보통날의 시선 62
차갑고 명징明澄한 공기가 뺨을 훑는다. 얼마나 기다려온 촉감인가. 이 감각을 맞닥뜨리기 위해 봄과 여름, 가을을 보냈다. 겨울이 와야만 느낄 수 있는 이 맵싸한 바람을 피부로 느끼면서야 비로소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냉기 섞인 바람이 뿜어내는 알싸함과 황량한 살풍경이 소리 없이 점령해 왔다. 겨울은 텅 빈 것들 속에서 홀로 준열하다. 공기를 가르는 주도면밀한 차가움을 좋아한다. 어릴 적 겨울 아침 손에 쩍 달라붙던 문고리의 차가움처럼 겨울은 그렇게 냉철하게 온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다.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서울에 살았다. 시험을 치르고 몇 사람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차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향하려는데 겨울바람이 어찌나 드센지 머리카락은 온 얼굴을 덮고 발걸음은 휘청거렸다. 움켜쥐지 않으면 어디론가 휙, 달아날 것만 같은 가방은 위태로웠다. 나는 바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치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라도 풍길 것같이 친밀하게 달라붙는 바람을 마음껏 마시며, 아, 좋다는 말을 연발했다. 서울의 저녁 공기가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만, 그날의 바람은 마치 내 삶의 터닝 포인트와 같다고 여겼고,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것만 같아서 부는 바람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꽉 움켜쥐었다.
“이런 바람이 뭐가 그렇게 좋으니?”
“뭔가 살 것 같아. 아니, 힘껏 살아내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아.”
“그래 오늘의 이 바람처럼만 살아라.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친구는 없고 그날의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어제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행정안전부를 비롯해 국토교통부, 군산시까지 10통의 재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마치 폭풍 전야를 맞는 기분으로 밤을 기다렸다가 이른 새벽의 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없다. 눈을 껌벅이며 눈을 찾았다. 눈 씻고 봐도 정말 없다. 물론 희끗희끗 눈 비슷한 게 눈에 띄기는 했으나 정작 있어야 할 눈이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제설 작업용으로 뿌린 염화칼슘 알갱이가 차도와 인도, 골목길까지 굴러다니며 눈 아닌 것이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
한껏 눈 쌓인 풍경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어서였을까. 다행이다 싶다가 한편 약간의 서운한 감정이 일었다. 기껏 긴장으로 올라간 어깨가 맥없이 풀리며 스르르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문밖을 나섰다. 제멋대로 노니는 바람만 아주 신났다. 지난밤 귀갓길에 마주한 바람 똑바로 보며 말했었다.
“바람아! 더 힘차게 불어라. 내일 내린다는 눈 모두 가지고 저 멀리 아주 먼 곳으로 가거라.”
사실 이런 바람이라면 어디선가 오고 있을 눈도 잔뜩 겁을 먹고 다른 곳을 향해 선회할 것만 같게 매서웠다. 나도 모르게 주문을 걸었다.
서둘러 나온 산책길, 얇게 입은 바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싶었으나 준비 중이었다.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성들이 들어온다. 완전무장하고 눈만 빼꼼하게 내놓은 채로 줄을 서서 커피를 빼고 있다.
“아니! 그렇게나 눈 많이 온다고 난리를 치더니, 안 오고 그랴. 온다고 했으면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거 아녀. 야단법석을 떨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온다는 눈 안 와도 섭섭햐! 안 오면 좋지. 뭘 그랴.”
“천지사방 염화칼슘 뿌려 놓은 거 봐. 나는 고것이 다 눈인 줄 알았당 게.”
“그런 소리 말어. 여그 안 온 눈이 쩌끄 남도로 다 갔댜. 거그는 지금 온통 난리 났당 게.”
커피 한 잔 마시는 동안 그녀들의 수다 바람이 하도 세서 커피가 쏟아질 지경이었다. 겨울 아니면 이런 수다가 가당키나 한가.
언젠가 눈이 펑펑 내리는 이른 아침 호수공원엘 나갔다. 공원 전체를 통틀어 산책 나온 사람이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적막함이 하얗게 감돌았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을 언제 만났던가. 눈밭으로 변한 호수공원을 맘껏 걸었다. 바람이 날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눈 해일이 달려오는 듯했다. 눈만 조용히 내리는 것과 바람과 함께 날리는 눈은 보는 맛이 다르다. 캄캄한 눈보라 앞에서 나는 아득하게 먼 어릴 적 눈과 만났다. 그때의 눈과 바람은 한없이 따뜻했다. 하얗게 펼쳐진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자연은 오늘의 것이되, 언제든 과거의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실감했다. 세찬 바람이 있어 눈보라는 더욱 시리고, 예리하며, 칼날처럼 파랗다.
모든 사물의 존재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겨울, 바람과 지나가는 구름을 배경으로만 자기의 존재를 살고 있는 겨울이지만, 따뜻함 쪽을 향하여 자기 몸을 내놓을 줄 아는 계절이다. 겨울은 무방비 상태로 무한하게 열려 있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허허로운 몸짓으로. 그러므로 겨울은 지극히 공평하다. 맨몸으로 버틴다. 꽁꽁 둘러싸고 눈만 내놓고도 춥다, 추워, 동동거리는 몸짓 겸연쩍게, 겨울은 의연하다. 죽은 듯 살아있다. 온갖 생명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하얀 칼바람 동원하고 제 마음껏 휘두르는 폭군 같다. 따뜻함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고 마는 허당 같은 겨울, 때로 바람도 축제가 될 수 있구나! 여기며 겨울을 견딘다. 바람은 언제나 새롭다. 낯설다. 늘 다른 얼굴로 온다. 겨울은 바람을 가지고 마음껏 기승을 부릴 줄 안다. 바람이 있고 겨울이 있으니, 우리는 기꺼이 봄으로 손을 뻗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