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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Jun 28. 2021

백합을 그리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 같다. 미술 시간이 따로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때까지 학교생활이 긴장되고 어색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모든 게 낯설어 겨우 짝꿍하고 말을 주고받는 소심한 시골아이였던 내게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어쩌자고 내 손에 아버지는 백합 화분을 들려 학교에 보내신 걸까? 커다랗게 하얀 백합 세 송이가 핀 화분이 교탁에 올려졌다. 바로 정물화 그리는 시간이었다. 준비물이었나보다. 그런데 왜 내가 가져온 화분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나는 창피했다. 


 하고 많은 꽃 중 백합이 뭐람? 코스모스, 채송화, 나팔꽃, 봉숭아, 과꽃도 있는데, 이렇게 튀는 꽃이라니. 휘둥그레지는 아이들의 눈을 나는 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두드러지게 한 아버지가 미웠다. 


 지금이야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지만, 당시에 백합꽃은 고급 꽃이었고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화분 중 정물화 그리기에 맞춤한 화분이어서 미술 선생님은 그걸 골라 아이들에게 그리라고 했겠으나 정작 나는 백합 화분과 교실의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수십 년이 지났건만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의 교실 풍경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교실에 은은하게 풍기던 백합의 향기, 스삭스삭 백합을 스케치하는 아이들의 연필 소리와 조용하기만 한 교실에서 그림에 열중하지 못하고 내 소심한 부끄러움과 아버지를 향한 뭔가 복합적인 마음이 엉켜 미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자신의 열망이 하얗게 날개를 펴고 날아가기를 바랐던 마음으로 딸의 손에 들려 보냈을 아버지의 백합이 칠월의 창밖을 향해 힘껏 제 날개를 부풀렸을 것만 같다고, 지금에 와 나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가난한 생계를 꾸리고 있던 아버지가 가닿고 싶은 곳의 세상에 건네고 싶었던 말이 백합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 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이다.


 평범하게, 어디에서나 지천으로 볼 수 있는 꽃이 아닌 뭔가 색다른 꽃을 고르고 싶었던 젊은 아버지의 백합. 비록 흙을 밟고 있으나 품은 꿈만은 여기 아닌 다른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건네는 손짓과 같은 백합.

 첫딸의 학교 준비물을 챙기는 아버지의 생계 버거운 어깨였으나 지금 여기가 아닌 저 멀고 낭만 있는 곳 어디쯤 자신의 삶을 걸어보고 싶었던 아버지가 그때로써는 꽤  이국적인 꽃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꽃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딸에게 처음으로 건넨, 마흔을 통과하고 있던 아버지의 생을 향한 바람 같은 것이 고스란히 깃든 백합꽃 화분이 내가 아버지한테 받은 최초의 꽃이다. 이후로 아버지와 나는 꽃에 관하여 많은 부분을 함께 했다. 


 백합꽃을 보면 나는 그 꽃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생에 발목 잡혀 맘껏 펼쳐보지 못한 아버지의 꿈이 서려 있는 듯해서 더욱더 그렇다. 


 꽃은 피고 지면서 이 지상을 밝히는데, 이제 내 곁에는 함께 꽃을 보러 다닐 아버지가 안 계신다. 


 아버지의 뒤꿈치도 따르지 못하는 나는 어린 시절 부끄럽던 백합꽃이나 기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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