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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Sep 01. 2021

도마의 시간


엄마의 도마를 들여다본 적 있는가.


 싱크대 구석에 곰팡이 핀 도마가 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도마가 오래 방치된 채 마른 틈을 보인다. 무수한 칼날에 찔리고 베어 움푹 팬 상처가 팽개쳐져 있다.



 물비린내 올라오던 흔적 없고 벌어진 틈만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도마를 쓰던 시절이 행복이었을까? 수없이 내리치던 도마 위에 지나온 한 생의 굴곡이 사방으로 뻗어 산허리 능선을 이루고 있다. 


 엄마는 서서히 도마를 놓기 시작했다. 점점 부엌에 들어가는 일을 줄이면서 밥때가 되어도 자식들 밥 주는 일을 잊었다. 사실 잊었기보다는 딸들이 부엌으로 들어가 엄마의 일을 대신 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한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도마 쓸 기회를 더 오래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엄마 힘들까 봐 먼저 나서서 부엌에 들어가니 엄마는 그야말로 아예 손을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지겹기도 했을 것이다. 부단히 종종거리고 다졌을 칼날의 시간 접고 인제 그만 쉬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 후로 부엌에서 손을 놓았다. 도마를 놓은 것이다. 살아 보니 알겠다. 사는 일은 뚝딱뚝딱 두 손 움직여 밥 먹는 일이다. 즉, 도마를 쓰고 활용하는 일은 어김없이 다가오는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며 살아서 행하는 생산의 일인 것이다. 


 도마 놓은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도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평생 부엌을 오가며 산 엄마를 위해 아버지도 드디어 부엌을 드나들게 되었다고, 이제 엄마의 수고를 좀 아시게 되었다고. 그러나 정작 아버지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나셨다. 


 도마는 그렇게 주인을 잃고 마모되어 가고 있다. 숱하게 베인 상처에 곰팡이꽃 핀다. 김칫국물인 듯한 희미한 얼룩이 마치 동백꽃 같다. 금 사이사이 도마에 새기고 갇힌 엄마의 끝없이 긴 생이 보인다. 


 생은 몇 개의 도마를 통과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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