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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May 10. 2022

부모도 인연

어버이날을 맞아 가족 납골묘에 다녀왔다. 농원에 들러 두 개의 미니 카네이션 다발을 만들었다. 하나는 시부모의 것이고 하나는 친정 부모를 위한 것이다. 

편안하게 잘 계시는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남은 자손들 무탈하게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기도는 늘 비슷하다. 간혹 좋은 일이 있거나 마음 쓸 일이 생기면 일상의 일처럼 도란도란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도 전해 올린다. 


 언제쯤에나 부모의 죽음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될는지 모르겠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수시로 울컥하는 바람에 듣고 있던 라디오 음악의 볼륨을 한껏 높이기도 하고, 차에 있을 때는 짐짓 창밖의 풍경을 힘주어 바라보곤 한다. 


  “그때 그러는 게 아니었어. 그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이런 생각이 미칠 때는 한참, 마음을 다독여야 한다. 사는 날까지 나를 돌아보게 할 영혼의 존재 같은 분들이다. 삶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낸 부모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에서 내 사유는 시작된다. 그들이 얼마나 일상의 최전선에서 힘껏 살아냈는지 짚어보면, 그들 곁에서 누린 호사만큼이나 나는 무심한 삶을 사는 것 같다.


 올해 나는 봄에도 풍경에도 꽃에도 사람에도 한없이 무심했다. 돌아보니 봄은 간 줄 모르게 갔다. 납골묘에 하얗게 피었을 벚꽃이 저 혼자 피고 지고 붉은 철쭉도 흔적 없다. 납골묘에 들어서니 노란 씀바귀꽃이 반갑게 맞는다. 어서 오라는 듯, 그동안 참 적적했다는 듯 바람에 흔들리는 꽃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붉은 카네이션을 부모의 가슴에 채워주던 때가 있었다. 카네이션이 달린 부모의 가슴은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날이라는 뿌듯한 마음으로 한껏 부풀었을까. 

 이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부모가 안 계시는데 나는 오늘 카네이션을 받았다. 꽃에 진심인 엄마를 위해 아이들은 필히 꽃을 산다.


 이렇게 삶은 순환의 고리로 이어지는 것인가. 의미와 형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으나 결국 삶은 무한반복의 여정이다. 그 누구도 결코 거스를 수 없는 무섭고도 거룩한 여정을 걸으며, 부모를 위해 카네이션을 사거나 받거나 하면서 우리는 시간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부모도 인연 따라왔다가 가는 존재들이다. 꽃이 피고 지는 일처럼 부모도 끝없이 생성되는 존재임을 안다. 

 자식을 배웅하는 듯 노란 씀바귀꽃이 오래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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