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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May 17. 2022

세상의 모든 저녁



해가 잠기는 시간, 어둠이 슬그머니 제 몸을 들이미는 시간, 낮 동안의 밝음이 모호한 표정을 주춤 숨기는 시간, 모양 있는 것들의 뾰족함이 어둠에 버무려지며 명료한 불빛을 낳는 시간, 아쉬움이 남으나 어둠의 친밀함을 받아들이는 시간, 달그락거리는 저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 돌아올 누군가의 마음이 두근거리는 시간, 놓쳐 버린 안타까움을 짐짓 모른 척하고 싶은 시간,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시간, 숨죽였던 가슴을 비로소 펼치는 시간, 바람에 흔들리는 모든 것들에 시선이 골몰해지는 시간, 살아있음을 흠칫 몸서리치는 시간,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얼굴이 사무치는 시간, 사는 것 별것 없다고 아주 잠깐 느슨해지는 시간, 순했던 날들이 있었나 짚어 보는 시간, 치열하게 살다 돌아온 이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어주고 싶은 시간, 구수한 밥에 얹힌 허기가 차오르는 시간, 어둠과 결코 다른 시간임을 증명하고 싶은 시간,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시간, 내 민낯이 평화를 느끼는 시간,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토닥이는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 이윽고 저녁이 다해 다시 저녁을 꿈꾸는 시간, 그렇게 세상의 모든 저녁을 통과하는 시간, 먼 길 돌아 어둠을 풀어 놓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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