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 위에 오르다.
2019년 5월 21일(화)
일정: 서울(인천공항)에서 파리.
잠을 잔다고 했는데 새벽에도 깬 것 같다. 하긴 결혼하고 이렇게 긴 시간 집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난 군번이 두 개다. 하나는 병사 군번 93-72002306, 나머지 하나는 군종목사 군번 02-20978.
결혼 후 1년이 지난 2002년 4월 나는 아내와 큰 아들을 두고 영천 3 사관학교에 재 입대했다. 재 입대 전 날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번 가는 군대도 싫다고 하는 마당에 예비군 훈련 7년 차에 접어든 시간에 재 입대는 잠을 설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아내와 큰 아들의 잠자는 모습을 보다 잠깐 눈을 부쳤던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처가댁을 나와 영천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었다. 그런데 17년이 지나 혼자서 걷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는 전날 밤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던지 쓴웃음이 나왔다.
5시에 눈이 떠졌고 어젯밤에 챙겨놓은 배낭을 짊어지고 아내에게 짧은 인사와 함께 출발했다. 공항은 떠나는 사람과 도착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활기가 있다. 그 활기 넘치는 사람들의 대열에 나도 동참한다는 생각을 하니 뿌듯했다. 반면에 긴 시간 내가 잘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더 큰 짐으로 뿌듯한 나를 누르고 있었다. 한국 들어오기 전에는 맛보지 못할 얼큰함으로 아침을 채우고 싶었다. 순두부찌개로 배를 채우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커피 먹는데 어제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신 순례길 어떻게 걷는지 궁금하니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잘하지도 않았지만 카스에 기록을 남기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때 남긴 기록이다.
지금 내 상황에 여행이 그것도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다. 5월 11일 저녁을 먹고 난 후 아내가 산티아고를 다녀오라고 했다. 장난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내는 나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작년 7월부터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기묘하신 손길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엘리야를 도우신 손길이 이것임을 체험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진 5월 아내는 자신에게 주신 부담감을 이야기하며 나를 기어코 길 위에 서게 한 것이다. 오래전 산티아고 길을 신문에서 봤다. 그 길은 산티아고 북쪽 길이었다.
요즘 TV에 나오는 길은 프랑스 길이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는 북쪽 길을 걷기로 했고 10일 만에 급조된 순례길이 오늘 시작된다. 7월 4일에 돌아온다. 850km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걸어 보련다.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뮌헨을 경유 파리에 도착했다. 예약한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하루가 참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