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좋아하려고 하는 시작점인 타이밍에 가버렸다.
남자 얘기가 제일 재밌는데, 사실 내가 만나는 모든 남자는 나에게 정말 정말 정말 잘해준다.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그리고 사실 몇 달 전부터 굳이 남자를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내 생활에서 나를 흔들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내 옆에 있지 않았으면 하는 심보랄까? 그래서 남자친구도 잘 안 사귀고 남자도 잘 안 만났다. 다행하게도 그리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고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안정적인 성격 탓에 나는 혼자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딱 어느 시점에, 이정도면 완벽하게 연애를 안 해도 되겠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웃기게도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정말 축복적이게도 인복이 많고 내가 팬이 되면 그 사람이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다. 그래서 신기하다. 항상 성덕이 된다.
어느 날 수업을 갈 때 졸다가 어느 장소에 불시착을 했는데 그곳은 한예종이었다. 외대 쪽에 있는 캠퍼스는 정말 오랜만에 가 보아서 외대랑 가까웠구나, 하고 깨달았는데 그 때 인스타그램 디엠을 확인했더니 정확이 그 내렸을 시간에 한예종에 다니는 내가 팬인 분께 연락이 와 있었다! 이런 동시성이 진짜 신기했다.
내가 전시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 오셨다. 비가 왔다. 우비를 입는 이유가 비를 맞는 게 좋아서 우비를 입는다는 말이 귀여웠다. 나도 사실 비맞는 게 좋아서 우산 없이 비맞고 다닌 적도 있었다.
우리는 나름 친해져서 자주 만났다. 처음 보았을 때 딱히 남자로 느낀 것 이라기 보다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예술얘기를 많이 했다는 게 너무 신났다. 그리고 내 상상보다 훨씬 따뜻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좋았다.
좋았다라는 말이 가장 깔끔하게 잘 들어맞는다.
그러고 가끔 혹은 자주 연락을 했다. 조심스럽기도 했고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려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생각은 나긴 했다.
우리가 간 모든 장소가 무릉도원 같았다. 자연에 주로 갔는데 우리는 날씨요정인지 엄청 맑은 날씨에 벚꽃이 흩날렸다. 그 흩날리는 벚꽃이 앉은 계곡의 바위 위에서 함께 누워 있기도 하고, 용산 가족공원에서 엄청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누워있고 그림도 그렸다. 관악산을 등산하다가 암벽등반에 성공한 나는 기쁨 반 혹은 무서움 반ㅋㅋ으로 그 사람에게 안겼는데, 그게 정말 좋았다. 내가 바보같은 다섯살이 되어 오빠에게 안기는 듯한 포근하고 안심되면서도 설레는 느낌이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의 흠과 단점도 보였지만 오히려 내가 팬인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보다 더 그게 좋았달까. 인간적인 모습이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가버렸다.
이상하게 만나다가 중간중간 내 마음이 아팠는데, 그 사람이 아파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감은 정말 신기하다.
왠지 안정적인 느낌의 사람은 아니었다. 기반이 엄청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만나면서 나에게 확신을 주지 않았다. 애매하게 굴기에 대체 무엇일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여하튼 내가 좋아하니 나는 그냥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나는 어떻게든 후회하고 싶지 않았고 좋아한다는 마음을 계속해서 표현했다.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좋다는 걸 꽁꽁 숨겨서 나중에 후회하는 것 보다 나으니 나는 계속해서 표현했다.
마지막 날에 그 사람이 같이 술마시자고 했는데, 그 연락을 받자마자 무슨 말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딱 느껴졌다.
삼 년 간 만났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는데 못 잊었다고 하더라. 나는 그 여자분의 얼굴을 안다. 누군지도 아는 것 같다. 여하튼 내가 이 분의 몇 년 전부터 팬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펑펑 울었다. 실은 엄청 짧은 만남이지만 나는 요상하게도 엄청 짧은 기간 내에도 엄청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같다. 이 사람이 나보고 금사빠 같다고 했는데 사실 난 정말 금사빠가 아니다. 누군가를 갑자기 좋아하게 되면 딱 그 사람만 오랫동안 좋아한다. 참 신기하지만 그렇다. 내가 너무 정이 많아서 그런가?
엄청 엄청 엄청 많이 울었다. 너무 너무 너무 아쉬웠다. 난 이제 시작인데 그대로 끝나버렸다.
며칠 동안 내가 만신창이같았다. 그래도 기운 차리려고 이것저것 하루의 감사한 일도 적고 힘 내려고 의쌰의쌰 작업도 했더니 지금은 괜찮아졌다. 이 사람은 sns를 갑자기 안 한다.
오늘 그냥 문득 생각이 났는데, 생각난 김에 이 사람에 대하여 고마운 점들을 적어보았다.
나쁘게 끝난 것도 아니고 실은 시작조차 하지도 않았지만 내 기억속에서 좋게 간직하고 이 사람도 아프지 않고 그 전 여자친구도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 청일 오빠가 파리에서 헤어질 때, 이별은 슬픈 거지만 너무 슬퍼하진 말고, 우리 사이를 너무 놓아버리지도 너무 잡지도 말자고 했다. 내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끝나버렸고 난 웃기지만 미련하게도 일 년 간 그 사람을 못 잊었었다. 딱 그 오빠가 생각이 났다. 사람과 사랑은 참 재밌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작년 5월 부터 지금까지 스쳐 지나갔던 남자들이 조금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정말 증발하듯 나에게서 떠나갔는데 이번 사람은 꽤 많은 교류를 했다는 것에서 감사하달까. 나 그래도 많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다음에는 더 길고 평화롭고 서로에게 사랑을 듬뿍주는 사랑을 해야지.
여하튼 나에게 와주어서 너무 감사하다.
최근까지 무채색이다가 나를 만나 공원에서 혹은 등산하다가 정말 핑크색이 되어버린것 같다는 그 사람의 말이 기억에 남고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