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2주 전
떠나는 건 정말 싫다.
횡단보도에 서서 움직이는 트램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해. 오래된 트램의 나란한 창틀들은 꼭 필름 같아서, 창문 안으로 수많은 무성영화들을 볼 수 있거든. 비엔나의 겨울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트램 안은 너무나 고요하고 따뜻해 보여서, 가끔은 트램을 멈춰 세우고 창문 너머로 꽤 유명한 영화 주인공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여다보고 싶어져.
오늘은 타임랩스를 틀어놓고 투박한 케이크를 구웠어. 반죽을 틈틈이 섞고, 머랭을 지겹도록 치고, 설탕을 넉넉히 넣고, 빵을 몽글하게 구워내는 두 시간 남짓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는데 말이야. 생크림 위에 듬뿍 얹을 딸기를 잘게 써는 건 진짜 재미있었는데. 다 만들고 그제야 타임랩스를 돌려보니 수북한 딸기를 자르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정말 빠르게 지나가더라. 잘 기록하고 싶어서 일부러 천천히, 꾹꾹 눌러 썰었는데도.
떠나는 건 정말 싫다.
2020년 한 해를 보내면서 올해 가장 후회되는 일에 대해 하나씩 말하기로 했어. 기억의 테이프를 되감아보면, 이상하게도 가장 잘한 일 같은 건 쉽게 생각이 나는데 가장 후회되는 일은 꼽기가 어려웠어. 하나를 고르기 어려울 만큼 우리가 후회를 많이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괜히 마음만 아픈, 후회되는 일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리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일까? 고민 끝에 나는 날이 매번 좋았던 여름철 더 많이 놀러 다니지 못한 걸 골랐어. 유럽의 겨울 날씨는 조금 우중충하니까. 어쩐지 밖보다는 집에 있게 되는 요즘이거든.
딸기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 트램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어. 한 달 후쯤의 나는 지금을 되감아보며 어떤 후회를 하게 될까? 비엔나의 마지막 시절을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은 작별인사일까 하고. 나는 문득 많은 곳을 가고 싶어 졌어. 비엔나가 사람이라면, 얼굴을 맞대고 손을 잡고 한 품에 꽉 안아주면서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 넓고 커다란 도시를 안아주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구석구석, 발 닿는 곳이라면 다 가보겠다는 마음이라고. 그래서 많이 눈에 담고 많이 익숙해질 거라고. 많이 글을 쓸 거라고.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울게 된 건, 마지막이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겠지. 트램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몸을 싣고 있는 이 칸도 한 편의 영화일까. 하지만 아무도, 이방인처럼 생긴 누군가가 비엔나를 사랑하게 된 자세한 이야기에 대해선 모를 거야. 비엔나를 사랑하는 건지, 비엔나에 머물렀던 기억들을 사랑하는 건지 조금 헷갈리긴 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이 곳이 좋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의 트램이 왼쪽으로 크게 몸을 틀며 시청 앞을 천천히 지나는 순간이 유난히도 익숙하게 기억날 것 같아.
떠나는 건 정말 싫다.
모든 것을 똑같이 기억하진 못할 거야. 오늘 찍었던 타임랩스처럼, 어느 순간들은 희미해지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 단편적인 조각들만 남겠지. 그래도 길고 긴 인생에서 십 분의 일 만큼이라도, 백분의 일 만큼이라도 내가 비엔나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나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어. 친구가 비엔나에 머무르는 동안 똑같은 향수를 틈틈이 뿌리라고 했던 적이 있어. 나중에 이곳이 보고 싶을 때면, 그때의 그 향수를 뿌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생각이 난다고. 나는 한국에서도 자주 이 향수를 들여다볼 것 같아. 비엔나의 건물들, 거리들, 음식들, 사람들, 소리들, 날씨들, 색깔들 모두 다 그리워서.
시간이 유한함에 감사해. 이곳에 영원히 머물렀다면 오히려 가보지 않았을 곳들도 많았어. 어쨌든 이건 긴 여행이니까.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매 순간 모든 것을 더 담으려고 했으니, 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
이 정도면 작별 편지로 꽤 적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떠나는 건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