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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행성 Jan 20. 2021

누군가 내게 비엔나는 어떤 도시냐고 묻는다면

그립다는 말 대신 눈이 많이 왔더라고


2021년 1월 18일. 월요일. 흐림. 가랑눈이 조금씩 옴.


오늘도 자주 눈이 내렸습니다. 비엔나는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두 번 눈이 오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나의 기억 속 비엔나는 어쩐지 하얗고 조용합니다. 초등학교 때 쓰던 일기장에는 꼭 날씨에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쳐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날짜 옆에 반듯하게 오늘의 날씨를 적곤 합니다. 오늘 입었던 옷이나, 먹었던 음식, 만났던 사람의 이름 정도를 적을 수도 있을 텐데. 맑음, 흐림, 비가 옴 따위의 몇 가지 안 되는, 몇 없는 선택지의 뻔하고 반복되는 날씨를 일기에 적는 습관은 누가 먼저 들인 걸까요. 나는 오늘 어느 수업에서 '착각 상관'이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사람들은 날씨가 오늘의 기분에 영향을 준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럴 뿐인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기분이 가볍습니다. 삼일 내내 눈이 지겹도록 자주 오는 시절을 살아내었다고, 그렇게 일기에 적습니다.


오늘은 꽃을 한 다발 샀습니다. 비엔나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꽃병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햇살 좋은 날 아무 시장에서 아무 꽃을 사다가 방에 들여놓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9월의 약속을 채 지키지 못하고 이 곳을 떠날까봐 서둘러 집 앞 가게에서 튤립을 골랐습니다. 나름의 작별인사였습니다. 분홍색도, 빨간색도 아닌 딱 그 중간 정도의 색깔이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 꽃을 들여놓으니 방이 낯설게도 환해졌습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자주 튤립을 꽂아두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도나우 강을 따라 하얀 눈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눈길의 끝은 아득히 멀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꽁꽁 언 강의 테두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비엔나에서 차마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비엔나에는 오래된 카페가 많습니다. 백 년, 이백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 액자를 떼어낸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런 빛바랜 카페들이요. 나는 할 일 없는 시절 그런 카페에 오래도록 앉아 따뜻한 멜랑지 한 잔을 시켜놓고 긴 글을 써 내려가는 오후들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또, 좋아하는 영화에 나오는 비엔나의 작은 레코드판 가게에 가서 이름도 모르는 가수의 낡은 앨범을 사는 상상도 했습니다. 모두 아끼고 싶어 무더운 여름이 다 갈 때까지 남겨두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가을이 되니 가게들은 락다운으로 문을 닫아 기다리던 순간들은 영영 오지 못했습니다. 어느 마시멜로 실험에 관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교훈은, 어른이 된 나에겐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눈길의 끝에 도착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강을 따라 어느 정도 걸어왔는지 가늠이 되니, 따뜻한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늘 그렇듯이. 


꿈같던 이 시절을 끝내고 돌아가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때 비엔나에 살았었더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내게 비엔나가 어떤 도시냐고 묻는다면, 오래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낭만적이지도 않지만 꽤 다정한 도시, 오래된 건물과 궁전 사이로 트램이 지나다니는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산책하는 사람이 많고 밖에 앉아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는 도시, 낯선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가운 도시, 한 블럭 건너 블럭마다 꽃집이 있을 만큼 감성 있는 도시, 밤에는 거리 곳곳 눈부신 조명이 켜져도 꼭 그만큼 조용하고 고요한 도시, 여름엔 자주 햇빛이 들고 가을엔 매번 흐려도 겨울엔 종종 눈이 흩내리던 도시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요.


긴 말 대신 웃으며 비엔나에는 자주 눈이 왔었어,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내가 비엔나를 그리워한다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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