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행성 Nov 06. 2020

7시간 느리게 부치는 편지

비엔나와 서울의 시차가 내게 남긴 것


은정에게.


어떤 새벽을 보내고 있니? 나는 나의 하루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의 가운데에 서 있어. 너에게 곧 도착할 단어들을 적어 내려 가는 연필의 사각거림을 빼고는, 콘센트에 짜르르 흐르는 전기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먹먹한 침묵이야.


지구 반대편에 산다는 건, 정확히 말하면 아주 반대편은 아니고 반대편보다 조금 더 가까운 곳이지만, 낯선 우주에서 혼자 표류하는 것 같아. 꼭 8천 몇 킬로미터씩이나 떨어져 있는 물리적 거리 때문만은 아냐. 처음 비엔나에 왔을 때 가장 낯설었던 건 저녁 7시부터 밤 12시까지의 침묵이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비엔나와 서울의 시차는 7시간이야. 떠나기 전날 너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지만, 내가 네 핸드폰을 꾹꾹 눌러 바탕화면에 두 도시의 현재 시각을 나란히 띄워줬잖아. 여전히 가끔 확인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차 적응에 꽤 애를 먹었어. 잠들고 깨어나야 하는 시간에 금방 익숙해졌다고 하지 않았냐고? 맞아, 하지만 진짜로 시차에 적응하는 건 그런 게 아니더라.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7시간 빠르게 생각하는 버릇부터 버려야 했어. 그러니까 몸은 이곳의 시간에 맞춰 깨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한국의 사람들이 거의 다 잠들어버린 그곳의 새벽 2시 그리고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그곳의 아침 7시 사이엔 여전히 잠들어 있었던 거지.


아침을 먹으면서도 오후 수업을 듣는 친구들을 생각했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들을 생각했어. 그러다 어김없이 저녁 7시가 찾아오면,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는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가, 7시간 후의 답장을 기다리며 혼잣말을 자꾸자꾸 남기곤 했어. 말 그대로 진짜 혼자가 된 거야.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막 밤 11시를 지나고 있어. 여전히 침묵의 시간이야. 어색하지 않느냐고 묻겠지. 조용함이 곧 외로움으로 느껴진다고 말한 적이 있었잖아. 잠시의 적막도 허용하지 못한다는 너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쩐지 외롭다면서 밥을 먹을 때도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틀고 세수를 할 때도 물소리보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었지.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들여다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빈 시간을, 빈 소리를 견디지 못해서 곰인형에 솜을 채워 넣듯 공허 속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욱여넣는 삶을. 은정아, 어쩌면 침묵은 침묵으로 놔둬도 괜찮을지 몰라. 침묵은 언제든지 부술 수 있지만 고요함은 늘상 얻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비엔나에 와서 7시간의 침묵을 얻었어. 텅 빈 우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롯한 나만의 시간. 모든 전원을 차단하고, 혼자 이곳에 존재한다는 걸 깊숙이 느낄 수 있는 시간대. 덕분에 너에게 조용히 편지도 쓸 수 있어 좋다. 이 시간 동안 단단해져야 하겠지. 나는 지금 낯선 우주에서, 혼자서도 타인의 중력에 휩쓸리지 않을 만한 질량을 가진 하나의 행성이 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야.



자정 종소리를 들으며 곧 다가올 새해를 생각해. 나는 비엔나의 어느 곳에서 카운트다운을 할 테니, 서울보다 몇 시간 늦게 나이 드는 셈이네. 너에게 직접 말해줄 수 있다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부럽다고 할 텐데 말이야. 서울에서 비엔나까지 비행하는데 무려 16시간을 썼는데도 오히려 7시간이 생겼다는 것은 어쩐지 신기하다. 갑자기 손에 쥐어진, 사용법을 모르는 선물 같기도 했어.


만약 내 삶의 끝에서 7시간이 더해서 주어진다면 정말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거야. 좋아하는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씩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도, 추억이 많은 상계동 동네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둘러볼 수도, 못 보고 죽기 아까운 영화를 세 편이나 더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에게 7시간이 진짜로 생긴 건 또 아니라는 게 우스워. 타임머신이나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과는 다르게, 나는 과거를 다시 사는 것도 남들에게 없는 시간을 추가로 받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나는 지구 어디에 있든 여전히 태어난 지 8474일 하고도 14시간째인 나의 시간을 살아갈 뿐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7시간을 도로 돌려줘야 할 테니까.


맞다, 유럽에는 서머타임이라는 게 있는데.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이 되면 새벽 3시가 새벽 2시로 당겨지면서 서머타임이 해제돼. 그렇지 않으면 여기는 해가 오후 3시 반에 지게 되거든. 복잡하지? 여하튼 모두가 자는 새벽에 소리 소문 없이 바뀌니까, 별생각 없이 잠들고 일어나면 시간이 바뀐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거야. 맞아, 결국 시간이라는 건 사람이 만들어낸 하나의 지표라는 게 참 신기해. 그렇게 따져보니 낮과 밤만 다를 뿐이지, 우리는 그냥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조금 덜 외롭게 느껴지네.


어찌 되었건 이 편지도 시간을 거슬러서 너에게 가게 되겠지. 꼭 편지에 마법을 걸어서 보내는 기분이야.

너도 편지해줘.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빨리 도착할지도 모르니.


2020. 10. 24

서머타임의 마지막 날


소연


이전 02화 혼자 여행한다는 것의 의미 - 할슈타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