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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Feb 28. 2023

2. 태권체조 팀 모집합니다

2. 태권체조 팀 모집합니다


―태권체조 팀 모집합니다. 총인원 6명. 주제, 음악, 상의 후 결정. 언제든 강이나를 찾아오세요!

이나는 접착력을 잃고 팔랑팔랑 아래로 떨어지는 포스트잇을 주워 들었다. 도 대회 포스터 옆에 붙여 놨던 게 또 떨어진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큼지막하게 써서 붙이고 싶었지만, 관장님 눈치가 보여 어쩔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포스트잇에라도 여러 장 써서 붙여 놓길 반복하고 있었지만, 눈에 띄질 않아서인지 툭하면 없어져서인지 여태 아무도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 이러다 우리 대회 준비해 보지도 못하는 거 아니야?”

잔뜩 풀이 죽은 서하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나의 어깨도 축 처졌다. 고모 얘기까지 들먹거리며 음성을 높이던 관장님의 험악한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태권체조? 너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시답잖은 거 기웃거리라고 여태 훈련시킨 줄 알아? 강 사범은 대체 조카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관장님은 툭하면 고모를 들먹거리며 이나를 조종하려 들었다. 이나의 고모는 일등 태권도장에서 몇 년째 사범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나는 어릴 때부터 고모를 따라다니며 태권도를 배웠다. 주먹 말아 쥐는 법을 처음 알려 준 사람도, 발차기를 종류별로 가르쳐 준 사람도 고모였다. 관장님의 뜻대로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고모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포스트잇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태권도장 구석진 데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애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이나랑 서하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내놔. 돌려줘. 하지 말라고.”

거기엔 구름이랑 지세찬이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름이는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은 편이라 늘 같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는 애였다. 자신감을 길러야 한다며 름이네 아빠가 억지로 태권도장에 보낸 모양이었지만, 이나가 보기에 름이는 태권도랑 영 맞지 않았다. 미술 학원을 다니면 딱일 것 같은데 억지로 태권도장에 다니는 게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름이는 도장에 와서도 항상 손바닥만 한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연필로 이것저것 그리기만 했다. 평소에도 그런 름이를 못마땅해하던 세찬이가 괜히 또 트집을 잡는 모양이었다. 세찬이는 름이의 그림 수첩을 홱 뺏어 갔다. 키가 작은 름이의 손이 닿지 못하게 높이 치켜들고 빙글거렸다. 

“너는 여기가 미술 학원인 줄 아냐? 이건 압수야, 압수.”

세찬이는 수첩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름이를 약 올렸다. 름이는 깨금발을 하며 손을 뻗었지만, 손끝도 닿지 않았다. 그걸 본 이나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네가 뭔데 남의 걸 함부로 가져가고 난리야?”

이나가 올곧잖아 하며 따졌다. 그러자 이번엔 세찬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같잖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억지로 올려 웃으며 이나를 깔봤다. 

“넌 빠져. 끼어들지 말고. 대회가 코앞인데. 다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세찬이는 관장님이 하듯 위협적으로 눈을 부릅뜨며 벽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이나는 기가 막혀 “헛.”하고 헛웃음을 쳤다. 다른 애들이 다 자기 발밑에 있는 것처럼 구는 세찬이의 태도에 뒷머리가 땅겨 올 지경이었다. 

“너나 정신 차려. 다들 여기 태권도 배우려고 온 거지 너한테 잔소리 들으러 온 거 아니거든? 빨리 내놓기나 해.”

이나가 마구 쏘아붙이면서 힐끗 서하 쪽을 봤다. 그 눈짓을 눈치챈 서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어떤 신호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세찬이는 비아냥거리기 바빴다. 

“태권도장에 왔으면 태권도를 해야지. 이딴 거 끄적거리고 있으면 다른 애들도 다 딴짓하고 싶어진다고. 시후 지후 후후! 안 그러냐?”   

 수첩을 대충 넘겨 보며 이죽거리던 세찬이가 쌍둥이인 시후와 지후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시후랑 지후는 세찬이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 온 애들이었다. 얼굴은 물론 이름까지 비슷한 일란성 쌍둥이 시후랑 지후를 애들은 “후후!”라고 불렀다. 입 안에 가볍게 머물렀다 뱉어지는 숨처럼 산뜻한 어감이라 평소에는 둘을 부르기만 해도 다들 간지럼을 타듯 하르르 웃곤 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세찬이가 사납게 “후후!” 하고 부르자 잔뜩 성난 큰 짐승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가 더 굳어졌다. 하지만 막상 시후랑 지후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세찬, 세찬이. 그건 아닌 듯. 이번엔 이나 말이 맞아. 얼른 돌려줘라.”

“남의 걸 가져가는 건 나쁜 짓이다, 오버. 돌려줘라, 오버.”

후후 쌍둥이는 로봇 흉내와 무전기 받는 흉내를 내며 세찬이 주위를 어기적어기적 돌았다. 쌍둥이들이 당연히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던 건지, 이번엔 세찬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목덜미까지 빨개진 세찬이를 보며 이나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잽싸게 세찬이 가까이로 파고든 이나가 슬쩍 다리를 걸었다. 예상치 못 한 공격에 세찬이가 휘청한 순간, 아까 눈짓을 주고받았던 서하가 얼른 끼어들어 수첩을 홱 낚아챘다. 

“야, 받아!”

서하가 수첩을 휙 름이 쪽으로 던졌다. 름이는 얼떨결에 손을 뻗었다. 공중에서 몇 바퀴 돈 수첩이 부드럽게 름이 품으로 쏙 들어갔다.

“그렇지!”

이나랑 서하가 동시에 마주 보며 주먹을 부딪쳤다. 여기저기서 “호오.”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세찬이를 내버려 두고 이나는 름이에게 다가갔다. 

“어디 찢어진 데는 없어?”

“어? 어. 고마워.”

름이는 붉어진 뺨을 문지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사이, 다시 달려들려는 세찬이를 후후 쌍둥이가 양쪽에서 팔을 붙들고 저만치로 끌고 가 버렸다. 구경거리가 끝나자 애들은 어느새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하여간에 쟤는 툭하면 신경질이더라. 시합 때만 되면 예민해져서는. 태권도 배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인격 수양을 해야 해, 쟨. 흥.”

서하가 뒷머리를 질끈 올려 묶으며 투덜거렸다. 

“근데 름아, 항상 뭘 그렇게 그리는 거야? 혹시 좀 봐도 돼?”

평범해 보이는 민무늬 수첩을 보물처럼 끼고 다니는 게 신기하긴 했는지 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름이는 조금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 나도 볼래!”

서하가 냉큼 끼어들었다. 이나랑 서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름이의 수첩을 천천히 넘겨봤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둘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름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그려 온 그림들은 수준급이었다. 도장에 앉아 틈틈이 그린 거란 걸 믿을 수 없었다. 발차기나 주먹지르기처럼 기본적인 동작들을 스케치한 것뿐이었는데 모든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윤곽만 있는 그림들인데도 중요한 특징들이 또렷하게 드러나 생동감이 느껴졌다.

“너 진짜 대단하다. 와, 이런 재능을 또 몰라봤네. 인정!”

이나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게. 수첩을 폼으로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었구나?”

서하까지 덩달아 치켜세우자 름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쑥스러워하며 수첩을 다시 자기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 넌 도복에 주머니도 있네. 누가 만들어 준 거야?”

이나가 신기해하며 물었다. 원래 도복에는 주머니가 없는데 름이 도복엔 주머니가 있었다.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는 주머니였다. 

“아, 이거…… 내가 만들었어. 불편해서.”

름이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별것 아니라는 투였지만, 이나와 서하는 다시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직접? 바느질로?”

“재봉틀이 집에 있거든.”

“헐, 대박.”

이나랑 서하는 동시에 고개를 내저으며 손뼉을 쳤다. 여러모로 대단한 애다 싶었다. 셋은 내친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학년이고 여러 해 동안 태권도를 같이 다녔지만 사실 셋이서 얘기를 나눠 본 건 처음이었다. 반도 달랐고 름이가 워낙 차분하고 얌전한 성격이라 어울려 볼 기회가 없었다. 어색해서 전혀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을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했다. 알고 보니 름이는, 다그치지 않고 조금만 기다려 주면 느리지만 정확하게 자기 말을 전달할 줄 아는 애였다. 

“아휴, 하여간. 어떻게 한 명도 안 모이냐. 어떻게든 인원수 채워야 하는데.”

한참 얘기를 주고받다 태권체조 얘기가 나오자 서하가 기운이 쪽 빠져 울적하게 말했다. 

“그러게. 진짜로 하던 거나 계속해야 하는 건가.”

이나도 덩달아 새무룩해졌다. 시작도 못 해 본 채 여러 날이 지나자 불타오르던 의욕도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강했지만 자꾸 이게 될까 싶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서하 앞에서는 의연한 척했지만 내심 기가 죽었다. 고모한테 피해가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됐다. 관장님이 이나에게 바라는 건 오로지 메달이었다. 겨루기와 품새 시합에 나가지 않겠다고 계속 우기면 그 화살이 고모에게로 향할 건 뻔했다. 종알종알 떠들던 둘이 순식간에 침울해지자 쭈뼛거리던 름이가 슬쩍 말을 얹었다. 

“있지, 그냥 시작해 보는 거 어때? 쉬는 시간에 틈틈이 음악 틀어 놓고 동작 연습해 보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관심 있는 애들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름이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이나와 서하가 “호오.” 하고 관심을 보였다. 제법 설득력 있는 말 같았다. 솔직히 손 놓고 있다고 누가 대신 나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맞네. 가만히만 있다고 뭐가 되겠어? 일단 해 보자. 안 돼도 해 보는 거지, 뭐.”

이나가 단전에 힘을 빡 주고 “이얍!” 하고 기합을 넣었다. 스스로를 응원하는 기합이었다. 

“그래. 까짓것! 한번 해 보자.”

서하도 똑같이 받아치며 “이얍!” 하고 기합 소리를 냈다. 번갈아 가며 기를 넣는 둘의 모습에 름이가 낮게 쿡쿡 웃었다. 

“야, 우리 하는 거 보고 재밌어 보이면 너도 들어와. 같이 하자. 응?”

이나가 름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당황한 름이가 얼른 손을 빼려 했지만 이나는 씩 웃으며 붙든 손을 위아래로 마구 흔들어 댔다. 

“좋아, 좋아. 우리가 멋들어진 걸로 준비해 올 테니까 넘어올 준비 하고 있으시라고.”

서하가 그 위에 자기 손을 포개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자, 아자, 파이팅!”

이나랑 서하는 동시에 팔을 번쩍 치켜들며 파이팅을 외쳤다. 본의 아니게 같이 팔을 번쩍 치켜들게 된 름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의욕이 넘쳐나는 둘 사이에 끼게 된 름이는 난감해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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