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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Feb 27. 2023

1. 다시 시작된 두근거림

1. 다시 시작된 두근거림


“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 어이!”

일등 태권도장에 아이들의 힘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먹을 똑바로 말아 쥐고 바른 자세로 서서 태권도 5대 정신을 외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이나는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단전에 힘을 꽉 주고 큰 소리로 태권도 정신을 외칠 때면 어김없이 가슴이 뜨거워졌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일곱 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했으니 벌써 4년. 주말이나 공휴일 빼곤 매일 도장에 나와 항상 같은 걸 외쳤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예의를 지키고, 부끄러운 걸 알고, 힘든 것도 참아 낼 줄 알고, 어려운 일도 포기하지 않으며 백번을 꺾어도 굽히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태권도의 정신이었다. 이나는 그런 태권도 정신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막상 훈련이 시작되자 이나는 바싹 마른 풀처럼 시들시들해졌다. 태권도 정신을 아직 사랑하는 건 확실했지만 뭔가 자꾸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품새 연습을 해 나가는 다른 애들을 보면서도 영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슬슬 3급 승급 심사도 준비해야 하고 겨루기 대회도 준비해야 하는데, 다 귀찮기만 했다. 재미가 없었다. 왜 이걸 하고 있는 건지, 습관처럼 몸을 움직이면서도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조용! 여기 주목.”

관장님이 항상 들고 다니는 나무 지시봉으로 벽을 세 번 세게 쳤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도 대회 일정이 오늘 나왔다. 참가할 애들은 준비 제대로 하고. 특히 강이나, 지세찬. 잘한다고 자만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훈련에만 매진한다. 알겠나?”

관장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각 지역 대표 태권도장들이 한데 모여 겨루는 도 대회 일정이 잡혔으니 이제 관장님의 어깨에 더 바짝 힘이 들어갈 것이었다. 관장님은 평소에도 엄격했지만, 대회 철에는 그 강도가 더 심했다. ‘일등 태권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훌륭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관장님의 생각이었다. 모두들 긴장된 얼굴로 띠를 고쳐 맸다.

게시판에 도 대회 일정 포스터가 붙었다. 관장님의 아들인 세찬이가 제일 먼저 달려가 꼼꼼하게 일정을 확인했다. 저번 대회 때 이나에게 밀려 은메달을 딴 게 아직도 억울했는지 날이 바짝 선 얼굴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세찬이와 달리 이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대회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품새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게 지겨웠다. 겨루기도 막상 시합에 나가면 짜릿함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성가시기만 했다.

“우와, 올해는 이런 것도 하네. 이나야,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봐.”

세찬이 옆에 서서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던 서하가 불쑥 이나를 불렀다. 이나와 동갑이지만 도장에서 키가 제일 큰 서하는 어디에 서 있어도 눈에 띄었다.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서하가 새끼 기린처럼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이나를 불러 댔다. 손목 발목을 풀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이나는 호들갑스러운 서하의 부름에 어기적거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몰려 있는 애들 사이를 비실비실 비집고 들어갔다. 

“이게 뭐야? 태권체조?”

무심히 포스터를 쳐다보던 이나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겨루기와 품새만 있을 줄 알았는데, 거기 낯선 종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권도와 체조라. 익숙하면서도 낯선 조합에 이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게 대체 뭔지 너무 궁금했다. 이나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 봤다. 동영상 몇 개가 바로 떴다. 제자리에 서서 영상을 하나씩 넘겨 보던 이나의 표정이 점점 다채롭게 변했다. 눈빛이 다시금 반짝였다.

‘바로 이거야!’

이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서하야, 이것 좀 봐 봐. 우리 이거 같이해 볼래?”

이번엔 이나가 서하를 이끌고 와 영상을 보여 줬다. 워낙 새로운 걸 좋아하는 서하의 눈빛도 기대로 반짝거렸다. 둘은 도장 바닥에 앉아 본격적으로 영상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평소에 훈련해 왔던 태권도의 기본 동작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음악과 함께 어우러지니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더 자유롭고 유연해 보였다. 역동적인 동작 하나하나가 이나를 사로잡았다. 

“야, 너네 훈련 안 하고 뭐 해? 아까 관장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 영상을 보고 있는데, 세찬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에 이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알아서 할 거니까 상관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이나가 대번에 대꾸했다. 때때로 세찬이는 마치 자기가 관장님이나 되는 것처럼 굴었다. 괜히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듯 말하곤 했다. 이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태권체조? 그딴 게 뭐 태권도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동작 연습 하나라도 더 해. 운 좋게 메달 하나 따 놓고 잘난 척하지 말고.”

세찬이는 이나의 단호한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세찬이의 태도에 이나가 발끈했다. 

“지세찬, 시비 걸지 마. 관심 끄라고.”

“그럼 딴짓을 하지 말던가. 도장 분위기 흐리지 말고 잘하라고.”

둘 사이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다른 애들이 슬슬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나도 세찬이도 지는 성격이 아니라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딴짓 아니거든? 나 여기 참가할 거야. 겨루기 안 나가고 태권체조 준비할 거라고.”

이나가 포스터를 주먹으로 쾅쾅쾅 세 번 내리치며 선언하듯 말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갑작스러운 얘기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세찬이가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참 나. 그거 팀 대회인 건 아냐? 너 혼자 뭘 하겠다고.”

세찬이는 쯧쯧 혀를 차며 머리를 내저었다. 바짝 약이 오른 이나는 깐족거리는 세찬이를 흘겨봤다. 

“팀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두고 봐. 나는 한다면 하거든?”

“오오, 우리 이나 멋있다! 나도 할래. 얍!”

당찬 이나의 말에 손뼉을 친 서하가 슥 주먹을 내밀었다. 둘은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다시 두근거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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