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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06. 2021

조선왕조실록을 알면 보이는 것들

 나는 위례 신도시에 살고 있다. 직장이 위례 신도시에 있어서 직장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로 이사를 왔다. 이사하는 날, 차에서 바라본 동네 풍경은 꽤 마음에 들었다. 계획도시답게 도로는 반듯하고 곧게 뻗어 나 있었다. 넓고 깨끗한 도로 주변에는 신축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서 있었고 시민들을 위한 공원도 잘 정비된 듯 보였다. 오피스텔 옆에는 대형 쇼핑몰이 있어서 쇼핑하기에도 편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난 후, 주민센터에 가서 전입신고를 하고 등기부 등본을 발급받았다. 주소지에는 ‘위례대로 190번지’라고 찍혀 있었다. 나는 공식적으로 위례 주민이 된 것이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이제부터 내가 살게 될 이 동네, 왜 이름을 위례라고 지었을까? 그것은 마치 ‘엄마, 내 이름은 왜 홍길동이야?’ 하며 드는 생각과 비슷했다. 


 우리 동네에는 ‘휴먼링’이라 일컫는 산책로가 있다. 총길이 4.4km 코스로 주민들이 도시 한 바퀴를 조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녹지공간이다. 나는 동네 구경도 할 겸 휴먼링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책로에는 곳곳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판 내용을 읽어보니 휴먼링의 소개와 더불어 위례 신도시의 지명유래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을 도읍으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즉 위례 신도시의 이름은 삼국시대 국가인 백제의 수도, 위례성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곳이 과거에 백제의 땅이었단 말인가?!


 나는 위례성의 정체가 궁금했다. 위례성은 하북 위례성과 하남 위례성이 있었다고 한다.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현재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위례성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역사학자들은 경기도 하남시와 남한산성을 포함하는 일대에 위례성이 있었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우리 동네를 ‘위례’라고 지은 것은 백제의 역사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제야 휴먼링 조경이 왜 성곽 형태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위례로 이사온지 몇 달이 지났다. 날씨가 맑아 집에만 있기 아쉬웠다. 나는 친구와 함께 등산을 가기로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산 탐방로는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집에서 가까운 데다가 등산 코스도 부담이 없다. 산성 성벽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평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등산로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크고 웅장한 성문을 마주하게 된다. 지화문이다. 성문 앞은 남한산성을 찾아온 등산객들로 늘 붐빈다. 나는 성문을 지나 성곽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성곽은 마치 병풍을 친 듯 아름다운 곡선 형태로 이어졌다. 가을에는 성곽길을 따라 코스모스가 피어난다. 맑은 하늘 아래, 알록달록한 단풍이 물든 성벽 너머의 풍경이 장관이다.

가을 정취를 느끼며 성곽 둘레길을 걷다 보면 직장생활에 지쳐있던 마음도 치유가 된다.  나는 그동안 남한산성을 등산 코스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남한산성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난 이후부터이다.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 군대가 6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자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나는 성곽길을 걸으며 병자호란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한양은 이미 함락되었다. 마지막 피신처인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인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인조실록>에서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중계하고 있다.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신하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어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인조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급작스럽게 대피하느라 많은 백성들이 이산가족이 되었다. 가슴 아픈 일이다. 곧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역사서 <연려실기술>에 당시 전투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

     

 적의 대포가 망원대에 맞았다, 대포알이 성첩에 맞아 한 귀퉁이가 거의 다 파괴되었다. 성 위의 얕은 담은 이미 가릴 것이 없어졌고, 병사들이 탄알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곧 군량을 넣었던 빈 섬 수백 개로 흙을 담아 파괴된 자리를 막고 물을 끼얹어 얼음을 얼게 하였다.   


 적이 포탄을 쏘자 성벽이 허물어지고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조선 병사들은 빈 가마니에 흙을 담아서 부서져 나간 성벽 자리에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물을 부었다. 한겨울이었다. 흙을 채운 가마니는 추위에 꽁꽁 얼어붙었을 것이다. 조선 병사들은 파괴된 성벽 자리에 가마니로 얼음 성벽을 만든 셈이다.

 치열한 농성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문제는 식량이 매우 부족했다. 성 안에서 버틸 식량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채, 급히 대피했기 때문이리라.


 성 안에 굶주림이 심했다. 말과 소가 다 죽었다. 굶주림 때문에 살아있는 것은 서로 꼬리를 뜯어먹었다.


 식량이 고갈되었고 병사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결국 45일 동안 성 안에서 항전하던 조선은 청나라에게 항복하게 된다.     


 남한산성은 수많은 산성 중 한차례도 함락당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한산성을 두고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라고 일컫는다. 해발 500m의 험준한 산맥에 구축한 성벽은 감히 어떤 적도 쳐들어오지 못했다. 과연 최적의 방어 조건을 갖춘 철옹성이라 할 만하다.

 나는 남한산성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던 중 <인조실록>에서 뜻밖의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가 백제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1637년 1월 8일, 인조가 백제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 예조가 아뢰기를, ‘사람이 궁해지면 근본을 생각하게 되고 병이 들어 아프면 부모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친히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내 신의 가호를 비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했다     

 

남한산성 농성전은 조선의 국운이 걸린 절체절명인 위기 상황이었다. 이때 인조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내며 조선을 지켜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남한산성에 온조왕을 모실 수 있도록 사당을 지으라 명했다고 한다. 국운을 맞은 인조가 대체 왜 백제 온조왕을 찾은 것일까? 나는 그저 의아하기만 했다. 이 궁금증은 남한산성에 위치한 숭렬전 건립 설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인조가 몹시 피곤하여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제의 온조 대왕이 나타나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북쪽 성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느냐”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놀라서 깬 인조는 꿈에서 들은 대로 즉시 북쪽 성 근처를 살펴보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청나라 군사가 북쪽 성벽을 몰래 오르는 것을 보았고, 이에 청나라 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인조가 백제 온조왕의 은혜를 입어 남한산성을 지켜내었다는 이야기다. 남한산성에 있는 숭렬전이 바로 온조왕의 신위를 모신 건물이라고 한다. 나는 숭렬전을 지나 남한산성 행궁으로 향했다. 남한산성 행궁은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이라 한다. 가만, 종묘사직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지 않은가. 

 놀랍게도 남한산성은 전란의 상황에서 조선 왕실의 임시 수도 역할을 한 것이다. 동시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기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수많은 역사의 숨결이 깃든 남한산성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내가 조선왕조실록을 읽기 전까지 남한산성은 산책과 휴식의 장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병자호란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를 돌아보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게 해 주었다. 그리고 삼국시대로 거슬로 올라가, 위례성의 주인이었던 온조왕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 주었다. 

 우리 집 옆에는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하남위례길’이 있다. 이번 주말에는 이 길을 따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볼 예정이다. 함께하지 않겠는가? 역사의 흔적은 생각보다 우리곁에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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