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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06. 2021

의녀, 조선 최고의 커리어우먼


남자 의사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 망측합니다    


 <태종실록>에 나오는 말이다. 조선 사회는 남녀가 유별하는 시대였다. 여성들은 남자 의원에게 진찰받는 것을 매우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여성은 아무리 아파도 남자 의원에게 몸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남자 의사에게서 진맥 받는 것조차 수치로 생각해서는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우리의 사고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는 여성 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들도 남성이 많지 않은가. 어찌 됐든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진료를 받지 못해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여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의녀’이다. 


 나는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는 직장인 여성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 의료인이었던 의녀들의 삶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 직업적 동질감이었을까. 나는 의녀의 세계를 엿보기로 했다. 한희숙 교수의 저서 <의녀>에 의녀들의 출신 배경이 나와 있다.     


 의녀는 조선시대의 최하위 계층인 관비, 즉 여종 출신이었다. 종의 신분을 타고났어도 똘똘한 아이들이 있다. 서울에 올라와 의술을 배우고 의녀로 생활하는 것이 종으로 사는 것보다 나았다. 나름대로 팔자를 고칠 수도 있었다. 잘하면 돈도 많이 벌고 궁궐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임금과 왕실 식구를 만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금지한 조선 사회에서 천인 출신인 관비는 남녀유별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관아의 여종 중에서 총명한 아이들을 선발하여 요즘 말로 ‘서울 국비유학’을 시켜 준 셈이다.


  선발된 의녀 후보생들은 기초적인 의학 과목 외에도 유교 경전을 읽고 깨우쳐야 했다. 의녀들이 배워야 하는 의학 학문의 범위는 넓었고 의료 기술은 어렵기까지 했다. 의녀가 되기 위해선 초학의, 간병의, 내의녀 총 3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각 단계별로 엄격하게 교육을 받았고 매번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시험성적은 개인 실력에 따라 철저하게 매겨졌으며 낙제를 받은 수련생은 다시 관비 신세로 돌아가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의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학문에 매진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나 보다. 나는 의녀들의 수련과정을 알게 되자, 대학생이었을 때 의료기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다. 필기시험을 준비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실기시험을 치르던 날을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부여잡고 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난다.

 국가고시를 합격하고 직장생활 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부할 것은 많다. 신입 때야 비하면 여러모로 숙련되었다 해도 아직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 남아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도 다시 공부하는 한편, 새로운 의료기술과 장비가 도입될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헌데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에는 평민조차도 글을 아는 자가 많지 않았던 시대 아닌가. 천인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녀가 되기 위해 부단히 공부하고 의술을 연마했던 그녀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의녀가 되면 의원을 보조하는 일도 하였지만, 전문분야를 살려 때로는 진맥, 침술, 약을 조제하거나 치료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의녀가 치료에 직접 참여한 사례가 많이 나온다.

 내의원은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을 위한 조선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의녀들이 근무하는 곳으로 여기서 일하는 의녀들은 대우도 좋았다. 내의원에 소속된 의녀는 왕의 가족이 아플 경우 그들을 간호하기 위해 항상 대기해야 했다. 오늘날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인과 비슷한 형태로 교대로 숙직하며 간병과 치료활동에 힘썼다.     


 한류 원조라는 별칭을 가진 인기 드라마 ‘대장금’이 있다. 주인공 장금이가 궁궐에 들어가 최초 어의녀가 되기까지 과정을 그린 사극 드라마였다. 드라마에서 장금이란 인물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종실록>에서 장금, 대장금이란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대장금은 실존 인물로 의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다른 의관들과 함께 왕 가까이에서 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일을 하였다. 간호 보조 업무만 한 것이 아니라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사실상 임금의 주치의 역할도 한 것이다. <중종실록>을 보면 장금이 직접 진맥을 하고 처방을 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온다.     


 “요즘 풍한증이 있구나. 맥을 짚은 의녀의 처방에 따라 약을 지어 올리라”

 “대소변이 보통 때와 같지 않구나. 의녀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써야 할 약을 의논하여라”

 "여러 달 병을 앓다가 거의 회복됐구나.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 쌀과 콩 각 15석씩 하사하여라"  

 

임금을 치료하는 의사를 어의라 하듯 왕의 병을 진찰하고 간호하는 의녀를 어의녀라 부른다. 어의녀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의녀는 수의녀라 불렀는데 오늘날 직급이 가장 높은 간호사를 수간호사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대장금은 왕을 돌보는 어의녀이자 수의녀였다. 

 이처럼 의녀는 왕과 왕가 여인들을 가까이에서 보살피고 치료했다. 의녀는 천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인정되면 국가로부터 경제적인 혜택을 받았다. 또한 사회적으로 나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의술로 공을 세운 의녀는 신분을 세탁하는 면천의 기회도 주어졌다. 한국 의학사상 가장 특별한 여성 의료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녀의 활동 범위는 다양했다. 왕실 여성을 치료하고 간병하는 일 외에도 다양한 곁가지 업무가 있었다. 궁궐 안에서 여성이 관련된 범죄가 일어나면 의녀가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오늘날 수사관이나 여형사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의녀에 관한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학교에 입학한 종친들이 어머니나 부인의 병을 핑계 삼아 결석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제부터는 의녀를 보내 어머니나 부인의 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의녀가 종친들의 꾀병 여부를 조사하는 임무도 맡았던 셈이다. 의녀는 오늘날 여의사나 간호사 역할뿐만 아니라 필요에 의해 감사관이나 법의학자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의녀는 의술을 배운 전문적인 지식인이었음에도 환자 치료에만 전념하기가 어려웠다. 사회 사치 풍조가 만연해진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의녀들이 각종 연회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기녀들과 함께 술잔치에 동원되기도 했다. 의녀가 기생으로 차출된 것이다. 이처럼 풍기가 문란해지자 국가에서는 의녀를 함부로 술자리에 부르지 못하게 단속할 정도였다.

 의술에 힘써야 할 의녀가 남성들의 술자리에 동원되어 노리개 역할도 해야 했다니... 대장금처럼 몇몇 출세한 의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의녀들은 힘겨운 삶을 살았다. 신분이 높은 양반들의 강제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가난한 의녀들에게 경제적인 유혹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을까.     


 중동의 사우디에서는 최근까지도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물론 스타벅스 등 서구의 체인점 카페서까지 남녀용 출입구가 따로 존재했다. 이슬람 율법 해석에 따른 ‘남녀유별’ 규범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극보수인 무슬림 사회에서도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에 용기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여성 인권이 억압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지켜지길 바라는 뜻으로 거리를 행진했다. 거리행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부상을 당했다. 이때 시위의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응급처치에 나선 여성이 있었다. 간호학 전공의인 파티마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친 사람들을 돕는 건 의료인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나는 단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에는 남녀가 유별해야 했다. 여성보다 남성을 우대하던 유교적 가치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녀는 그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섰다. 의료인으로서 사회 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얻은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했다. 의녀는 여성 사회 활동이 천시되었던 조선 시대에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전문직 여성이었다. 현대 시각에서 조선 최고의 커리어우먼이라고 볼 수 있다.


 중동에는 아직도 여성 억압적 제도 탓에 여성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직업적 사명감을 가지고 환자를 치료하는 여성들이 있다. 나는 파티마 같은 여성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조선 시대 의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상상했다. 만약 조선시대 장금이와 이라크에 있는 파티마가 만난다면, 둘은 서로를 보며 어떤 말을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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