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시니 Jan 17. 2021

# 13. 족발집에서 있었던 인사 회의

명확한 내용의 리뷰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

초등학생 때였던가, 우리 반엔 한 친구가 있었다. 도시락통과 견줄 수 있는 크기의 필통에 가득 펜을 넣어 가지고 다니며 새로운 펜을 소개해주고, 유행이 지났거나 잘 쓰지 않게 된 펜은 주변에 나누어주던 친구. 쉬는 시간이면 그 친구 필통에 업데이트된 펜을 구경하기 위해 모였던 기억이 있다. 리뷰 유튜버처럼 필기감, 굵기, 그립감 등 생생한 리뷰를 해주던 친구는 리뷰가 끝나면 친구들 중 몇 명에게 펜을 주었다. 하루에도 몇 개씩 나누어주던 펜 때문에 그 리뷰를 끊지 못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 한 차례 이야기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면 나는 그 친구가 남겨진 펜들을 종이에 써보면서 "이건 남기고, 이건 오늘 써보자."라며 나 혼자 펜 품평회를 하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다.


퇴사를 한 후에도 동료들과 근무를 할 때만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사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의 퇴사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의 마음고생과 새 출발을 응원하기 위해 족발집 회동을 했다. 새로운 곳에 취직하여 그 날 퇴사한 사람과 그 날 그 회사(내가 이전에 다니던)를 퇴사한 사람, 그리고 그 회사를 6개월 전에 퇴사한 사람들이 모여 회사 생활을 안주 삼아 술로 넘겼다. 거나하게 취해 헤어지고 그다음 만나 산책을 하며 듣게 된 이야기는 초등학생 때 친구를 생각나게 했다.


사원에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팀장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퇴사 파티를 하며 듣게 된 이야기로 임원의 직원 품평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COVID-19 N차 대유행으로 회사 수입 구조에 다시 문제가 생기자 급하게 임원 및 팀장급 회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임원은 사원을 나열하고 


○ 필요해? □ 어때? 필요해?


라며 애매한 기준으로 직원들을 품평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당하지만은 않게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몇 명이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그 직원 또한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퇴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품평'의 뜻은 품질의 좋고 나쁨을 평하여 정한다는 뜻이다. 친구의 펜 품평은 철저히 친구의 기준으로 좋음/나쁨을 정하기 때문에 주관적이지만 사용자로서 아주 정확하게 좋음과 나쁨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직원을 '필요'에 의해 좋음과 나쁨으로 평가하는 것은 납득하기가 참 어렵다. 화가 난다.


작은 회사와 큰 회사를 구별하는 것은 배울 게 있는 회사와 같이 배워야 하는 회사를 구별하는 것과 같은 기준들이 있다. 내가 경험으로 배운 것은 '인사 체계'이다.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성과, 기획력, 근태 등 객관적으로 직원을 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연봉 협상 시 인상 여부나 그 회사가 당면한 특수한 경우(인건비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결정에 필요한 자료로 사용되어야 한다. 급하게 소집된 회의에서 개개인의 필요성을 논할 것이 아니라. 


족발집 회동에서 취한 것은 족발이 맛있어서도 있지만 그 회사라는 훌륭한 줄지 않는 안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수많은 안주를 주고받으며 나는 몇 가지 지표를 만들었다. 면접 때에 이 지표를 활용해 나 또한 회사를 평가하고 결정하려고 한다. 후회가 적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2020년에서 2021년이 되는 때에 이전 회사 동료들에게 엽서로, 마음으로 새해 복을 빌어주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연락을 유지하며 새해 복을 빌어줄 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은 '그 회사'라는 전쟁에 같이 참전했기 때문이다. 감정과 개인적인 사정으로 요동치는 평가 체계 안에서 전우애로 뭉쳐 서로의 실수를 덮어주던 전우들이 그 안주를 잘 소화하여 각자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은 내게 더 멋진 인생을 살고 싶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 12. 'good' bye, 좋은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