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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Jan 17. 2022

때로는 숨이 짐스럽지만

이 주쯤 전에, 칼바람이 부는 한강변을 따라 따릉이를 탔다. 처음이었다. 따릉이도 처음이었고, 자전거를 제대로 타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26.9년의 세월 동안 난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상태로 살았다는 말이 되겠다. 꼭 탈 줄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청년이란 무언가 묘하게 이질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전거 타기를 시도해본 것은 24살쯤이었나, 누군가 이사를 하면서 처분 곤란한 꽤나 고가의 자전거를 나에게 주고 갔을 때였다. 탈 줄도 모르면서 덥석 받아버린 자전거를 끌고 나는 늦은 밤 으슥한 곳으로 갔다. 다 큰 어른이 자전거 위에 얹혀 뒤뚱거리는 꼴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인적 드문 공터에서 나는 두세 번 자전거에서 '떨어'졌다. 안장 높이를 조절할 줄 몰라서 다리가 땅에 닿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은 넘어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추락이었고, 연습이라기보다는 일련의 허우적댐이었달까.

추락하는 것들에게는 날개가 있다는데, 내 등에 돋아난 것은 기껏 해봐야 닭살 내지는 소름뿐이었다. 


미츠코시 옥상을 오르는 이상 같은 심정으로 페달을 밟아봐야 날개는 돋아날 기미가 없었다. 자전거는 탈 것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잃은 채 위태로웠고 나는 그것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운동신경에 대해 생각했다. 학창 시절부터 운동을 막 잘하진 못했어도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정도까지였나 보다.


이후 그 고가의 자전거는 동네 자전거 보관대에 방치돼 몇 번의 소나기와 고된 햇볕 속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풍화되었다.


그랬던 주제에 무슨 바람에서인지 한겨울에 느닷없이 따릉이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차피 자전거 타는 방법은 글이나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일단 물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헤엄칠 수 없는 것처럼, 따릉이도 일단 빌려놓고 보면 요금이 아까워서라도 타보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실제로 빌려놓고 보니 그렇게까지 아까워할만한 액수는 아니긴 했다.


여하튼 정말 신기한 일은 여차저차 대여한 따릉이를 끌고 한강공원을 벗어난(사람 없는 곳으로 가려고) 다음이었다.


예의 그 몇 년 전의 추락을 떠올리며 별생각 없이 자전거에 올라탄 나는 그 상태로 내리 30분을 달렸다.


엥? 


두 개의 대교 사이를 몇 번 왕복했고, 중간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여유도 있었다. 그때 문득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알았다. 요령이 부족해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대퇴근이 후들거리는 것만 빼고는 자전거 도로를 오가던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풍화된 녹슨 자전거와 따릉이의 간극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몇 번의 추락 끝에 나는 이미 자전거를 탈 줄 알았고, 다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은 글이나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백번 옳았다. 그것은 뭐랄까,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수동적인 작업- 이를테면 '눈 깜빡이기' 같은 모종의 작업과 유사한 양태였다.


'그냥'이라는 무책임한 단어로 밖에 말해질 수 없는, 일종의 감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감각은 언어보다 본질적이다. 따라서 세상에는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도 있다. 자전거 타기가 그랬고, 헤엄치는 법이 그렇고, 그 외에 쓰여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사실 뜬금없이 이 추운 날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나 보다. 한두 살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해보지 않은 것,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싶었다.


점점 내게 주어진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 삶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속수무책으로 잃고 있다는 무력감이 실은 두려웠다. 크고 작은 고난을 겪으면서, 세상이라는 복잡다단한 곳에 내던져진 나는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또 자유는 일면 정말 깊은 심연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조금은 지쳤던 것 같다.


때로는 숨이 짐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 지곤 하는데 그날은 그게 자전거였던 것이다.


어찌저찌 따릉이를 반납하고 후들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영화「데몰리션」의 한 장면이 묘하게 겹쳤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감정을 잃었던 데이비스가 차창 밖으로 생동하는 세상을 문득 감각하는 장면- 있긴 있으나 스스로 있는지 몰랐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씬(scene)이었다.


허둥지둥이든 엉망진창이든 어찌 됐던 살아있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한 순간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때때로 삶의 진실은 그렇게 조용하게 은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나는 이미 자전거를 탈 줄 알았고, 다만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그것은 사고될 수 없는, 말해질 수 없는, 쓰일 수 없는 하나의 체화(體化)된 경험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삶은 파도가 칠 때 자연스럽게 손을 젓는 것과 같았다. 삶은 계량화되고 체계화된, 그리고 분절된 단락으로써 존재할 수 없었고, 오직 하나의 서사적이고 유기적인 흐름으로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몰려들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파도에 올라타는 것뿐이었다.


헤엄은 어떤 허무주의, 패배의식적 작태로가 아니라 긍정, 수용으로의 전회로 헤쳐졌다.


눈을 깜빡이는 일, 숨 쉬는 일, 입 속에 놓인 혀의 위치 같은 건 의식하는 순간 '고장'나기 마련이다. 일종의 괴리라고 해야 할까, "내가 이걸 어떻게 하고 있지?" 하는 순간 버벅이고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의식하지 않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전제이자 파도라는 사실이, 순간의 모습으로 문득 은은하게 다가왔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회 속에서 어른으로 살아가는 일은 실로 짐스럽다. 삶의 이유를 찾아봐야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아포리아(aporia)만이 기다릴 뿐이다. 생에는 이유가 없고, 그 자체로 인과가 완성되는 자기완성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니 부디 버거워하지 말길. 당신은 이미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 말은 얼렁 뚱땅이든 좌충우돌이든 어찌 됐던 파도를 헤치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헤엄치는 법은 알고 있다.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주어진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것, 그것으로 끝끝내 생은 완수되고 평화는 찾아올 것이다.


얼레벌레 살다 보면 이리저리 어른이 되어 사람 노릇은 하게 될 것이니, 그러니 부디 불안하지 말길.


다만 자전거가 나아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발을 굴러야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어찌돼도 좋으니 멈추지만 말자. 그것만으로도 삶은 흐르고, 숨은 쉬어진다.


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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