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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엔 Dec 08. 2020

세상은 모순 덩어리

그냥 일기

 가끔 철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철길이란 말은 우리에겐 부정확하고 포괄적인 표현이라 일반인이 아는 철길을 우린 선로 혹은 레일이라 부릅니다. 선로는 기차가 다니는 길이라 우리 같은 노동자가 걷기엔 정말 불편합니다. 자갈이며 흙이며 기차에 유의하며 앞을 보며 걸어야 하는 우리지만 어쩔 수 없이 땅을 보고 걸어야 다치지 않습니다.


 반면에 선로는 기차 입장에서 보면 정말 부드럽게 쭉쭉 뻗어있습니다. 그래서 시속 300km에도 끄떡없나 봅니다. 어쩌다 선로에 고라니나 멧돼지가 있어 사고가 나도 그들에겐 슬픈 얘기지만 선로 및 열차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로전환기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탈선등의 대형사고를 발생시킵니다. 여기서 선로전환기란 직진밖에 못 하는 열차를 본선에서 부본선, 측선 등으로 가게끔 해주는 장비입니다. 쉽게 말해 좌회전 우회전을 열차의 핸들이 아닌 바닥에 있는 선로의 방향을 변환시켜 좌측이나 우측으로 가게끔 해주는 장비를 선로전환기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위만한 멧돼지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던 선로와 열차는 이 선로전환기가 5mm만 벌어져 있어도 탈선이 됩니다. 그래서 그 장비 담당인 신호팀, 그로 인해 레일이 휠까 염려하는 시설팀, 사고 난 열차를 운행하거나 타고 있는 승무팀 및 코레일 자회사분들, 2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열차 시각을 조정해야 하는 역무팀 등 거의 모든 팀 및 심지어 타사 직원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게 정말 작고 하찮아 보이는 5mm에서 시작됩니다. 선로전환기는 이래서 중요하지만 그래서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1mm


 전 평소 튼튼한 맨탈을 지녔다 여기지만 가끔 5mm같이 사소한 것에 맨탈이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사로 가 1년 만에 돌아온 대리님을 만났습니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대리님은 대학시절 휴학 없이 조기졸업 후 칼 입사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라 동경의 하위 감정인 질투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년 뒤에 부모님이 사준 아파트가 올라 시세차익으로 5억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난 대리님을 보며 '모순'을 느꼈습니다. 그리곤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주식만 쳐다보며 일처리를 미루는 차장이 받는 연봉이 내 몇 배는 된다는 점, 공부 한번 안 하며 애들을 괴롭히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내동창이 벤츠에서 내리고... 등등 세상이 이상했습니다.


2mm


 저는 학교에선 공부하라고 배웠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부모님에겐 남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배웠으며, 사회에선 불로소득은 숭고하지 못한 행위니 그러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하라는 대로 모나지 않게 컸다고 자부합니다. 사실 배우면서 나는 당연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냥 막연히 그러면 안 되는 행위라고만 배웠습니다. 아마 짐작컨데 가르치는 사람도 명확히 왜 그러면 안되는지 모르고 가르쳤을 겁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거니까요.


3mm


 헌데 세상이 가르치는 대로 성실히 배웠는데 내 월급은 월세, 관리비, 생활비, 통신비, 등등으로 빠져 적금은 꿈에도 못 꿉니다. 그리고 남는 건 나이뿐입니다. 아.. 고시원에서 베란다가 존재하는 원룸으로 간 것도 남긴 거라 치면 1개 있네요. 왜 그럴까요? 어릴 적 5학년 때 몸이 아파 학교에 몇 달간 못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좋아했던 어린 저의 실수가 이렇게 뒤늦게 벌을 받는 걸까요? 아니면 그때 스킵된 학업진도처럼 세상 살아가는 진도 중 원룸에서 아파트 가는 부분을 스킵당한 걸까요? 도무지 세상을 모르겠습니다.


4mm


 이렇게 또 세상은 잘 못이 없고 내 노력이 부족하다며 결론을 짓고 퇴근 후에도 영어 공부를 하며 제 여유를 좀 더 졸라맵니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저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문도 없는 고시원에 다시 가야 하니까요. 이렇게 전 열심히 안 하면 안 됩니다. 가끔 티브이를 보면 세상을 즐기라고 하는데 부럽지 않습니다. 그건 거짓말일 테니깐요. 세상은 즐기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라 배웠습니다. 티브이는 모순적입니다. 월급을 받는데 없습니다. 월급은 모순입니다. 회사를 출근하는데 퇴근하고 싶습니다. 회사는 모순입니다. 어디 가면 건물은 맨날 짓는 것 같은데 나 살 곳은 없습니다. 건물은 모순입니다. 다 모순입니다.


5mm


탈선했다.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

정말 사소했다. 1mm 상태였어도 난 이걸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터지기 일보직전인 풍선 같은 맨탈에선 저 뭉뚝한 보도블록 점자들이 바늘보다 따가운 역할을 했다.

 "아니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글을 읽고 이걸 피해? 세상은 모순 덩어리야!"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근데 왜 세상이 모순이 아닐 거라 생각을 하는 거야?"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맞다 세상이 모순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배운 대로 살아갈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래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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