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동

작품 6편

by 김동관

나의 존재/ 박상동


나는 이런 아빠이기를 바란다


어떤 어려움이 내 아이에게 닥쳐와도
슈퍼맨 같은 해결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무거운 고민 앞에서도
그저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
작은 위로가 되는 존재이기를

언제나 아이의 선택에 힘을 보태는
든든한 후원자이기를


이젠 다 컸다며 귀찮다 말하는 잔소리에도
모른 척 귀 기울여 주어
아내의 질투 어린 눈길을 슬쩍 받는
그런 아빠이기를


사소한 일에도 쉽게 웃고
그 웃음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
구김 없이 자라는 손주들 곁에서
행복해하는 딸의 옆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는 사람


어느 날 문득
다 자란 아이들이 제 자식에게
삶의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오랫동안, 이 땅에 사는 동안
나는 그런 하부지 이기를


잠들기 전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 말해 주는 손주
같이 놀자며 내미는 작은 손을
기쁘게 맞잡아 줄 수 있는 사람


무릎 위에 앉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 아이들 마음속에서
작은 꿈으로 자라나기를


그림 그리기, 소꿉놀이, 술래잡기, 숨바꼭질
그 어떤 놀이에서도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고
부르면 언제든 환한 미소로 대답해 주는
그런 할아버지이기를


훗날 그들의 기억 속에서
기쁨을 주던 친구이자
언제든 달려오던 해결사
따뜻한 조언자였던 할아버지로
남아 있기를


그들을 너무도 사랑했었던 사람으로





무엇이 남았는가?/ 박상동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며 서울의 한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다. 현대미술, 그중에서도 건축과 조각, 퍼포먼스 아트를 아우른 전시가 열린다 하여 호기심이 일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나를 맞은 첫 작품은 외줄을 타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한 손은 천장에 매달린 밧줄에 의지하고, 다른 손에는 막대기를 쥔 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겁에 질린 눈빛, 굳게 다문 입술. 작가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취약함과 동시에 쉽게 꺾이지 않는 탄력성에 주목하라 말한다.


그가 입은 티셔츠에는 “WHAT’S LEFT?”라는 문구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위기의 순간, 우리 앞에는 추락과 평정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만이 공존한다. 불안과 시련이 이어지는 삶의 여정 속에서 그것을 건너가는 과정,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심리의 작용을 이 작품은 조용히 묻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며 물질과 정신의 감각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이 남았는가?” 그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복되는 투쟁을 견디며 삶을 이어 간다.

최근 개봉한 영화 「오징어게임 2」가 떠올랐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게임에 모여든다.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사람들은 둘로 갈라진다. 멈추려는 이들과 계속하려는 이들. 전자의 사람들은 쓰러지는 이들을 보며 인간의 원초적 본성을 돌아보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에서 이익을 계산한다. 심지어 더 많은 몫을 위해 살아 있는 이들마저 해치려 한다.

전편에서 살아남아 거대한 돈을 손에 쥔 주인공은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마음속 깊은 괴리와 공허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게임의 주모자들을 막겠다며 다시 그 잔혹한 세계로 들어간다. 그의 모습은 물질이 인간 존재의 중심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남겨진 재산은 그의 무너진 정신을 구하지 못했다.

요즘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비슷한 물음을 품는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선택했을 때 국민이 겪는 혼란과 고통은 얼마나 큰가. 그럼에도 젊은 이들 속에 남아 있는 정의감이 서서히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본다. 그렇다면 그 지도자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거리에 나선 극단의 지지자들인가, 명령에 따라 방패막이가 된 젊은이들인가, 헌법적 가치를 외면한 이기적 정치 집단인가. 어디에서도 답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남았는가?”거창한 제목을 내건 예술가도, 영화 속 주인공도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불의에 맞서려던 계획은 또 다른 죽음을 낳고, 정의감으로 글을 쓰는 나 역시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해답을 성경에서 찾는다. 열왕기하 4장과 마태복음 14장.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른 선지자 엘리사, 남은 한 그릇의 기름에서 수많은 그릇을 채운 기적. 그리고 주 예수께서 남은 몇 개의 떡과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 엘리사는 예수님의 예표였고, 두 분은 동일한 일을 행하셨다. 곧, 생명 안에서 이루어진 은혜의 이적이었다.

그 생명과 은혜 안에 머물 때“무엇이 남았는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절박하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박 상동


바람이 불면 연을 띄우리라
시련을 타고 창공을 날아
무지개를 찾아 나설 것이다


바람이 불면 꽃씨를 날리리라
바람이 머무는 곳, 고요의 땅 위에 누워
새 생명의 움틈을 기다릴 것이다


바람이 불면 가슴을 열리라
소망과 꿈이 좌절되더라도
담대히 가슴속에 품고 나아갈 것이다


바람이 불면 고개를 더 들리라
오감을 열어 큰 숨 들이마시고
정수리 깊은 곳 사색으로 달랠 것이다

바람이 불면 더욱 사랑하리라

기댈 수 없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대마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흔적/ 박상동


이른 아침, 모로 누운 잠에서 눈을 뜨니
귓가에 소리 없이 내린 하얀 서리가
눈앞을 가로막습니다.


몸을 일으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 위로 지나온 타국의 삶이
애처로운 무늬처럼 어른거립니다.


어느 해 겨울, 기차역 카페 조명 아래
옅은 미소만으로도 눈부시던 첫 만남은
이제 조용히 사그라들었습니다.


공중에 살짝 들어 올리면
홀로 둥둥 떠다닐 것 같던
단발머리의 날렵한 모습도
세월 속으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십여 년을 함께 울고 웃던
타국에서의 시간들은
육신의 흔적을 지나
마음의 무늬로 새로이 새겨지고,
서로를 보듬고 달래며
조금 더 아름다운 빛으로 남으려 합니다.


훗날 세월이 더 지나

서로의 몸과 마음의 흔적들을

자랑스레 어루만지는 날을 기대하며.




벌리 헤드에서, 길을 생각하다/ 박상동


벌리 헤드(Burleigh Head) 국립공원.
언덕 위, 차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끝에서 내리자마자 지친 운전자의 발걸음은 정자 그늘을 먼저 찾는다.


해변을 끼고 멀리 보이는 도심을 한눈에 담고는
일부러 그곳을 피해 온 사람처럼 자연이 내어주는 바람을 들이마시며 괜히 우쭐한 기분이 된다.

연인들은 이 주차장 언덕이 목적지인 양 벤치에 앉아 사색을 즐기느라 움직일 줄 모른다. 나의 사색은 숲이 부르는 바람 소리를 따라 길을 걸으며 비로소 시작된다.


작은 출입문을 돌아 선택된 흐름에 이끌리듯 입구로 들어선다. 포장된 길을 따라 바닷길로 이어지는 난간을 잡고 미끄러지듯 걸어 내려간다.
마치 엄마의 뱃속 긴 기다림을 통과해 세상 밖으로 나온 갓난아이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고도 신비롭다.


이름 모를 들풀, 바닷바람에 납작 수그린 잔디,
뿌리가 드러난 나무, 크고 작은 돌들, 파도와 바람 소리.

어리둥절한 아이의 눈으로 시간의 흐름을 지나오다 보니 손에 잡힌 난간 끝은 자갈밭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계단에 잠시 앉아 해변을 바라본다.


평평한 바위 위에 선 어른 옆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작은 낚싯대를 쥐고 있다. 어른은 바늘을 만지며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아이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진지하다.

물고기가 잡힐 것 같지 않은 자리지만 어쩌면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법을 처음 연습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새벽잠을 털어내기 힘들던 나를 데리고 아버지는 종종 저수지로 낚시를 가셨다. 두 살 위 형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 혼자 따라간 기억이 더 많다. 아마 형보다 내가 토요일 새벽잠을 마다하고 나설 만큼 낚시에 더 마음이 있었나 보다.


미끼를 어떻게 끼우는지, 찌가 얼마나 오르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물고기를 잡기보다
물고기가 바늘을 물기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아버지는 긴 설명 대신 낚시찌를 바라보는 당신의 옆모습으로 조용히 가르쳐 주셨다.


휙, 하는 바람 소리에 추억에서 깨어난다.
서핑 보드를 안은 젊은이들이 자갈밭 해변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간다. 모래사장에서 바다로 나가기까지의 지루한 헤엄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 급한 서퍼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한가운데로 가기 위해 이곳까지 뛰어와 곧장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진다. 맨발로 뒤뚱거리며 자갈을 헤치는 뒷모습이 정겹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하다. 그들 또한 나름의 인생 지름길을 개척하는 중이다.
어린 낚시꾼도, 젊은 서퍼도 파도의 세기를 가늠하며 언제 도구를 바다로 던질지 기다린다. 지금 이 순간이 그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시간일 것이다.


학창 시절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내 삶의 방향을 정했듯이, 바다만 바라보며 걷다 고개를 들자
반대편에는 거대한 바위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낙석 위험, 빨리 통과하라”는 낡은 표지판이 겁을 주지만 나는 멈춰 서서 그 바위를 바라본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아니라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세월의 흙먼지와 바람을 견디며 들풀과 나무뿌리와 얽혀 이룬 거대한 시간의 몸집이다. 작은 바위 하나로는 머무를 수 없기에 서로 타협하고 섞이며 버텨 온 그들만의 지혜가 보인다.


1979년 봄, 신입생의 꿈으로 들뜬 학창생활은
그해 겨울부터 거대한 바위산과의 싸움이 되었다. 작은 솔잎들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발밑에 떨어진 최루탄 하나에 혼비백산 흩어지는 우리를 보며 이 방식의 저항이 무력함을 깨달았다. 휴교령으로 갈 곳을 잃은 채 대학로를 어슬렁거리며 잔을 기울이고 한편으로는 살 길을 찾으려 책장을 넘기던 날들.


바위산을 뒤로하고 걷다 보니 절벽 아래 태평양의 파도와 강물이 맞닿는 경계에 다다른다. 거대한 방파제가 마중하고 밀물을 따라 돌고래 떼가
강줄기를 거슬러 오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훈풍에 가슴이 깊게 열린다. 눈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으니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마치 인생의 황금기에 서 있는 듯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성한 나무들이 햇살을 가리더니 갑자기 나타난 철문 앞에서 멈칫 선다. 늦은 시간 방문객을 막으려 세운 문인가. 스산함을 안고 안으로 들어서니 세월에 꺾이고 휘어진 고목들이 저마다의 향기와 색으로 맞이한다.


나이 들면 고집스러워지는 사람들처럼 그들 또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포장이 끝난 산길은 지친 다리를 강가 모래사장으로 인도한다. 고운 모래의 따스한 온기가 모든 것을 품어줄 듯하다.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아 자연이 주는 누림 속에 몸을 맡긴다. 낮잠을 청하며 꿈속에서 현재의 나를 바라본다.


세월을 낚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 채 다시 길을 나선다. 끝자락에서 갈림길 지도가 나타난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지금까지 걸어온 길. 결정의 순간이다. 편안히 되돌아갈 것인가, 언덕을 넘어 새로운 길로 갈 것인가. 어떤 길을 택해도 목적지는 처음 들어선 작은 출입구일 테지만 쉽게 안주하는 선택은 왠지 비겁하게 느껴진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언덕을 향한다.
언덕 위에서 인생의 미래가 손짓한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도 시원하고 이름 모를 새소리도 정겹다.


어둑해지는 길목마저 포근하다. 함께 걷는 사람의 손이 따뜻하다. 두려움은 이제 없다. 계속 걸을 수 있는 길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뿐이다.





영화 “하얼빈“/ 박상동


한국영화 “하얼빈”을 관람했다.

대한독립투사 안중근을 다룬 영화이기에 일본군을 처단하는 독립군의 통쾌한 승리의 장면을 생각했다. 또한 당시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는 안중근의 영웅적 장면에 대한 단순한 기대를 했었다.


영화의 도입부는 대충 이렇다. 함경도에서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그곳을 점령한다. 몇 명 남은 일본군을 만국법상의 전쟁포로로 인정하여 안중군은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들을 풀어준다. 일본군 장교는 풀려난 후에 다시 군인을 모아 독립군 근거지를 공격하여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안중근을 제외한 모든 독립군은 죽고 만다.


홀로 살아남은 안중군은 앞서 죽은 동료에 대한 미안함에 괴로워하며 자신이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간다. 그런데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작품 이면서도 출연자들의 수시로 내뿜는 뿌연 담배연기, 그 속에서 많은 대화를 다루는 장면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영상의 흐름 속에서 느끼는 어두운 실루엣, 주인공 안중근의 동료와의 갈등 속에서 느끼는 인간적 고뇌, 믿었던 동료가 배신자가 되는 과정등, 내면적 심도 깊은 장면들만 보면서 조금은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작품이 흥행에 성공할까 하는 의아심도 생겼다.


배신자를 살려둠으로 그가 겪을 심리적 괴로움을 통해 그 상황을 극복하고 되돌아오는 모습, 이토를 죽이는 의거로 인해 조국의 백성들이 되돌려 받을 고통을 염려하는 모습. 이러한 생각지 못한 주인공의 고뇌를 통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도가 단순히 밖으로 드러나는 영웅적 모습의 안중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적 고뇌를 통한 주인공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감독의 절제된 의도는 참으로 평범치 않은 시도를 한 작품이란 생각도 들었다.


장면 중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런 뜻의 말을 한다. 만주에 거주하는 독립군은 누가 그들을 알아주거나 권력이 있거나 힘이 있거나 하는 이들이 아닌 평범한 민중이 모여서 집요하게 자신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과거 수백 년간 조선을 침략했지만 번번이 막아서는 것은 무능한 왕실이나 부패한 관료들이 아니라, 바로 힘없어 보이는 의병(義兵)인 조선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정말 이토가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감독이 만든 이 장면을 통해 과거의 상황에서 현재의 모습을 바라본다.


2024 년 겨울, 그 추운 밤 무지한 한 나라의 지도자와 그가 뽑은 관료가 저지른 내란을 국회의사당에 모인 의병 같은 시민들이 모여 나라를 구했다. 장갑차를 막아선 청년들은 군인들을 돌아서게 했으며, 시민들의 응원봉 불빛은 또 다른 큰 외침이 되었다. 그나마 양심 있는 갈등으로 소극적인 임무수행을 한 일부 군인들은 국회의 행동을 도왔다. 만주와 하얼빈에서 펼친 독립투사들의 영화를 보며, 어느 작가가 말한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 광주 민주화 운동, 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었고, 과거의 죽은 자가 산자들이 모인 이 현재를 구했다.


불현듯 내 젊은 날의 모습의 일부가 떠오른다. 1979 년 겨울, 서울역 광장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며 다녔던 그 시간. 1980 년 교정에서 어깨동무 자세로 동료들과 학교정문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 내려올 때, 발밑에 떨어진 최루탄 연기 속에서 느꼈던 솟구치는 의연함, 죽음의 두려움, 스쳐 지나간 엄마의 얼굴. 되돌아보면 내가 마치 의병이었을 그 시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