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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사랑입니다

혁필 일상 1주일 기록

by 김동관

퀸스랜드 시골에서 맞이하는 한가한 일요일입니다. 집에서 쉴까 생각하다가 빵과 시리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쇼핑센터 오픈 시간에 맞추어 10시에 일하러 나왔습니다.


일요일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쇼핑센터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장사가 안된다는 걸 알지요. 그래서 장사할 생각은 접고서, 유튜브로 고국 뉴스나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답니다. 그러다 보면 종종 어리숙한 사람들 몇이 와서 그림을 몇 장 팔아주기도 하지요.


오후 3시쯤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 나도 물감통 뚜껑을 닫고 쇼핑센터를 나온답니다. 일요일은 특별히 외식하는 날입니다. 오늘 하루 번 돈으로 타이 식당에서 똠냥수프나 베트남 식당에서 월남국수 Pho 한 그릇 사 먹을 생각 하면 행복하지요. 저녁 먹으러 가기 전 먼저 주변의 강이나 해변 산책로에서 1시간 정도 걷다가 일찍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가서 빨리 잠자리에 드는 게 우리의 일요일 보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운이 좋은 날입니다.


어제 오후 한 손님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아이 다섯 명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가 이름 5개가 적힌 리스트를 주고서 5시 안에 찾으러 오겠다 하고 갔었지요. 요즘 같은 불경기에 다섯 개 주문이라니, 기쁜 마음으로 신나게 이름을 그려놓았는데 결국 찾으러 오지 않은 겁니다. 좋다 만 꼴이 되어 씁쓸하게 어제 하루를 마감했고 오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이쁜 엄마가 다시 애들 다섯을 거느리고 짠하고 나타난 겁니다 ㅎㅎ


이렇게 해서 오늘도 똠냥꿍 한 그릇 만나게 먹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ㅎㅎ. 이제 그만 뚜껑 닫고 저녁 먹기 전 보타닉 가든이나 구경하러 가 봐야겠습니다.

(2021. 9 26 일)


월요일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보통 월요일은 한 주 일을 시작하기 위해 물건을 한 짐 싣고 와서 책상 위에 펼쳐 디스플레이하고 전등으로 환하게 비춰서 그림이 예쁘게 보이게 하지요. 그런 후 간판을 부치고 자리에 앉아 종이를 펴고 물감 뚜껑을 열고 붓을 깨끗이 닦아 펼쳐놓습니다. 그러면 손님 맞을 준비가 끝납니다. 그런데 이 일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이 들어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요.


이렇게 일할 준비를 다하고 커피 한잔 타서 마시면서 유튜브 TBS 뉴스공장을 통해 고국 소식을 듣다 보면 월요일 오전 시간이 어느덧 반이 지나버립니다.


오늘은 또 어떤 손님이 올까 기다릴 때 이제 더 이상 마음이 조급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찾아주면 감사하다 생각하고 담담히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들 생각도 하고 페이스북 친구들 소식도 읽으면서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누군가 멀리서 내 그림을 보고 있지요.


오늘 오전도 운이 좋습니다.


검정색 빵떡모자를 쓰고 턱수염이 있는 아빠가 혼자서 2살 배기 아들을 쇼핑 트롤리에 싣고서 다가왔습니다. 남자가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쇼핑 온 사람은 싱글대디일 가능성이 많지요. 그래선지 아이들이 좀 꾀죄죄하게 보이고 왠지 생기가 없어 보이던데 이 아이도 부끄러움을 많이 탑니다. 또 다른 아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아들 하나뿐이랍니다. One and only son이군요라고 말해주고 이름을 이쁘게 그려주니 고맙다고 사갔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아빠란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찡하면서 기뻤습니다. 아마 이 돈으로 월남국수 PHO 한 그릇 사서 점심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2021. 9. 27. 월)


화요일은 뭔가 애매한 날입니다. 한주의 시작도 끝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니까요. 그래선지 주 중에 제일 한가한 날이지요.


호주에선 보통 수요일에 주급을 받던지 정부 수당을 받기 때문에 화요일쯤이면 보통 사람들의 호주머니는 텅 비어있지요. 그래선지 쇼핑하러 나온 사람들도 적고 또 쇼핑할 돈도 가장 부족한 보릿고개 같은 날이 화요일입니다.


이런 화요일이라 나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고 시간 때우다가 일찍 셔터 닫고 집에 갈 생각만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항상 그렇듯 예상치 못한 행운은 또 오고 말지요.


혼자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데 가무잡잡한 앞니 네 개가 빠진 60대 아저씨가 제 주위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만치 가다가 다시 와서 한 그림에 꽂혀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처음엔 모른 체하다가 슬쩍 걸프랜드 선물 생각하냐고 말을 걸었더니 그냥 친구랍니다. 자기는 아보리진 예술품 만드는 사람이고 여러 여자를 만나봤는데 이 여자는 좀 디퍼런트 하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해주더군요 ㅎㅎ.


그런데 이 그림이 무엇이냐면 내가 그림 글씨 몇 자 그려 넣고 이런 문장을 적어놓은 거랍니다.


FAITH makes all things POSSIBLE.

HOPE makes all things JOYFUL.

LOVE makes all things BEAUTIFUL.

The best of all is LOVE.


어떤가요, 좋은 문구 같은가요? 믿음 소망 사랑을 제 식으로 해석해 놓은 거거든요. 마음을 확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던 이 원주민 60대 아저씨에게 친구도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고 쐐기를 박았더니 이 앞니 빠진 아저씨 얼굴이 환해지며 현금을 투척하고 그림을 사서 갔답니다 ㅎㅎ.


이래서 또 나는 밥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빨리 퇴근하여 슈퍼에 들려 소고기 한 근 사서 아내랑 구워 먹어야겠습니다. 맛있는 저녁 되십시오^^.

(2021. 9. 28 화)


수요일은 한주일 중간에 불쑥 튀어나온 날이라고 해서 험프 데이(Hump Day)라고 부르지요. 일주일이 반환점을 돌아서 주말을 향해 가는 날이어서 인지 사람들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가게들도 장사가 되는 날입니다. 사실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주머니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일한 사람은 주급을 타고 실업자나 노인들도 수당을 타는 날이거든요.


호주는 참 좋은 나라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기본적 쇼핑을 할 수 있는 돈이 정기적으로 통장에 들어오기 때문에 모두가 최소한의 행복은 맛보며 살 수 있지요. 나도 예전에 아이들 키울 때 경제적으로 많이 힘든 시절이었지만 정부로부터 양육비 보조를 받을 수 있어서 아이들이 큰 결핍 없이 자랄 수 있었답니다. 애들 3명이 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부터는 더 이상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받은 게 많아 나라에 고마운 마음이 커서인지 내가 나이가 더 들어 연금을 탈 나이가 되어도 가능한 수당을 받지 않고 세금을 내면서 살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나에게 또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수요일 오후 험프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시간에 특이한 젊은 커플이 내게로 다가왔지요. 깡마른 남자는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데 통통한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주 키가 작은 아가씨였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눈에는 하트가 뿅뿅 반짝이더군요. 참 이상하지요. 키 큰 사람은 키 작은 사람에게 끌리고 키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에게 끌리는 게 말이에요. 아마도 사람은 자기와 다른 뭔가를 가진 사람에게 끌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는 이상한 글씨도 이들 눈에는 이쁘게 보이나 봐요.


이 착한 커플이 꽂힌 그림은 로미오 줄리엣 그림에 Together in love forever라고 적어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착하게 생긴 커플 이름을 이쁘게 그려주고 영원히 함께 사랑하라라고 써 주었더니 좋아서 돈을 투척하고 서로 뽀뽀하고 난리 났습니다 ㅎㅎ.


이렇게 해서 오늘도 하루를 기분 좋게 마치고 집에 갑니다. 어제는 고기를 먹었으니 오늘은 달링에게 된장국을 끓여달라고 해서 고향 맛을 즐겨야겠습니다. 구수한 저녁 되십시오^^

(2021. 9. 29 수)


오늘은 9월의 마지막 날이며 목요일 쇼핑데이입니다.


호주에서는 목요일을 쇼핑데이로 정해서 쇼핑센터 가게들이 저녁 9시까지 영업을 하지요. 보통은 5시 30분에 숍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직장인들을 위해 특별히 목요일에 늦게까지 문을 여는 겁니다. 수요일에 주급을 받은 직장인들이 목요일날 대거 쇼핑하러 나오기 때문에 쇼핑센터 가게들은 목요일이 일주일 중 매출을 제일 많이 올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은 이상하리 만치 한가합니다. 오늘 브리즈번에서 6명의 코로나 지역 감염자가 나와서 사람들이 혹 덜 나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 브리즈번과 골드코스트 지역 등에서는 마스크 쓰기가 다시 의무화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가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옆에 놓아둔 스텝퍼에 올라 운동을 하지요. 한참 운동을 하고 있는데 50대로 보이는 인상 좋은 레이디가 한동안 내 그림 하나를 유심히 보고 있더군요. 친구 선물 생각하느냐고 살짝 말을 걸었더니 자기 베스트 프렌드 생일이라고 하면서 그 그림을 사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그림은 제가 Friend라고 그려놓고 아래에 이렇게 써 놓은 거랍니다.


Friends are forever.

A friend is like a candle

that lights for you when you are in the dark.

친구란 어둠 속에 있을 때 촛불과 같은 거라고요.


사실은 오늘 한국에 있는 내 고교 단짝 친구로부터 아들이 10월에 결혼한다는 카톡을 보내왔었지요.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여서 아들 결혼식에 꼭 가봐야 하는데 코로나로 갈 수가 없어 어떻게 축하하는 마음을 전해야 하나 생각 중이었지요. 이 친구는 34년 전 내가 호주로 올 때 ROTC 장교로 군 복무 중이었는데 월급으로 모아둔 30만 원을 나에게 쥐어준 친구랍니다. 당시에 대기업 초봉 월급이 30만 원이 안 되었던 때였기에 적은 돈은 아니었었지요. 다행히 친구가 링크로 보내준 영상 청첩장을 열어서 결혼 축하 메시지도 쓰고 첨부된 아들 계좌로 축하금으로 백만 원을 송금했지요. 그리고 두 사람 이름을 이쁘게 그려서 결혼 선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답니다. 쇼핑데이인 오늘 돈은 많이 벌지 못할 것 같지만 내 베스트 프렌드에게 이렇게라도 나의 고마웠던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아주 기분 좋은 목요일 오후입니다. 이제 친구에게 보내줄 친구 아들 이름과 신부 이름을 정성 들여 그려보아야겠습니다.


9월의 마지막 밤 아름답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2021. 9. 30 목)


오늘은 10월의 첫날 금요일입니다. 금요일은 다들 좋아하는 날이지요. 오늘 일이 끝나면 달콤한 주말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열심히 일한 당신은 이 달콤한 주말을 만끽할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엔 먼저 우체국에 들렸답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 아들의 결혼선물을 한국으로 부치러 간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체국에서 물건을 부칠수가 없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한국으로의 우편물 서비스가 중단되었다는 겁니다. 결혼식도 못 가는데 선물도 보낼 수 없게 되어 친구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물은 늦더라도 꼭 보내려고 합니다. 막 결혼하는 친구 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놓았거든요. 이건 사실 내 아들과 사위들에게 더 당부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답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결혼할 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난 어제 오후, 한가한 틈을 이용해 친구에게 약속했던 친구 아들과 신부 이름을 정성껏 그렸지요. 이름 아래에 Love forever & always을 적은 후 이름을 액자에 넣고 액자 뒤편에 이렇게 써 놓았답니다.


결혼 3 계명

1. 항상 아내를 아껴준다.

2. 아내를 평생 주인공으로 대한다.

3. 아내의 성장을 계속 응원한다.

"Happy wife, Happy life"


오늘은 아내를 아끼겠다고 일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했는데 아마도 아내는 나를 아낀다고 내가 좋아하는 시원한 김칫국으로 저녁을 준비해 놓을 겁니다^^


부부란...

누가 높거나 낮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둘이 평등한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일 겁니다.


달콤한 금요일 저녁 되십시오.

(2021 10. 1 금)


오늘은 토요일, 일주일 중 축제의 날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잘 꾸미고 나와서 쇼핑을 하고 외식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축제의 시간인 거지요.


이곳은 시골의 작은 타운이라 코로나의 영향이 없어 아무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없습니다. 코로나로 시드니와 멜번은 1 천명대의 확진자가 매일 발생해 수개월째 록다운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퀸스랜드 주는 코로나 청정지역이 되어 평상시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지나쳐가는 사람들 모두 활기가 넘치고 행복한 얼굴들입니다.


지나쳐 가는 사람 중에 종종 우리에게 행운을 주고 가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행운이 찾아왔답니다^^.


그런데 외모가 심상찮습니다. 몸이 아주 뚱뚱한 할머니인데 휠체어를 혼자 타고 와서 내 책상 앞에 멈춰 선 거지요. 그리고 책상을 쭈욱 둘러보다가 그림 하나에 꽂혔답니다. 이것은 Family 그림에 아래와 같은 문구를 적어놓은 거랍니다.


Family is Forever.

Family is like branches on a tree.

We all grow in different directions,

yet our roots remain as one.

가족은 나뭇가지처럼 각자 다른 방향으로 자라지만 뿌리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한동안 구경하시게 가만히 있다가 자식들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9명인데 3명은 passed away 했고 남편도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패밀리 그림과 증손녀 이름을 그려달라 해서 이쁘게 만들어 드렸더니 아주 만족해하시며 사 가셨답니다. 이 할머니의 외적인 상황은 힘들어 보였지만 할머니의 얼굴엔 그늘이 없이 편안해 보이더군요. 호주인들은 참 낙관적이란 생각을 하였답니다. 사실 슬픈 과거를 생각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오늘 살아있고 휠체어를 타고라도 이동할 수 있다면 행복할 권리가 있는 거겠지요.


나도 오늘 저녁은 축제의 날로 보내야겠습니다. 일찍 끝내고 산정의 전망대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도 감상하고 다시 Thai레스토랑에서 새콤달콤한 Tom Yum 먹으러 갈 생각 하니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밤 되십시오♡

(2021. 10. 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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