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꽃

이쯤에서 놓아주는 것은 치유라고 발음해 봅니다.

by 서리달

어젯밤 불면의 출처가 두루뭉술해서 그럴까.


마주하고 있는 오늘이 칙칙하다는 감상을 깎아냈다. 다음을 약속했는데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은 말뿐인 약속을 떠올릴 때의 기분과 똑같은 기분. 오늘은 뭔가 좀 달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지만 배급된 오늘은 어쨌든 칙칙했다.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듯이 흩뿌려진 미세먼지 탓이라고 덧붙이려다, 어젯밤 불면의 출처가 두루뭉술한 탓일 거라고 덧붙였다.


칙칙한 오늘의 원인으로는 날씨 탓이 너무나도 훌륭하단 건 알았다. 하지만 날씨에 영향을 받기에 나란 놈은 이미 너무나도 많이 썩어있었다. 때문에 어젯밤 불면의 출처가 두루뭉술한 탓일 거라고 덧붙였다.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뒤척거리다가 일어나 담배를 물고, 30분쯤 어두컴컴한 바깥을 바라보다가 다시 누웠지만 깊게 잠들 수 없었다. 지독한 걱정거리라도 있었던 건지, 기록된 기억을 헤집어보면 지독한 걱정거리는 딱히 없었지. 이미 몇 번이나 겪었던 것 또는 해결을 포기한 채로 완결된 것들뿐이었다.


다음을 약속했는데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은 말뿐인 약속을 떠올릴 때의 기분과 똑같은 기분이 길어진다. 오늘은 뭔가 좀 다르길 바랐지만 어김없이 어제를 빼닮은 오늘. 마주하고 있는 오늘이 칙칙하다는 감상을 깎아냈다.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듯이 흩뿌려진 미세먼지 탓이라고 덧붙이려다 말았다.


미세먼지가 좀 있긴 해도 오늘의 날씨는 어찌 됐든 간에 화창하기만 하니까. 괜한 날씨 탓은 접어두고 어젯밤 불면의 출처를 어디서부터 채근하면 좋겠는지 가늠해 봤다. 근데 나 이런다고 해서 과연 마주하고 있는 오늘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단 사실 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였다.


다음을 약속했는데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은 말뿐인 약속을 떠올릴 때의 기분과 똑같은 기분. 오늘은 뭔가 좀 달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지만 배급된 오늘은: 어쨌든 칙칙하기만 했다.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일들은 놓아주고, 그만 허구라고 명명하자 작정한 채 마저 살아가기로 한다. 울음이 마른 눈가는 더 이상 비비지 말자. 말라비틀어진 피부가 빨갛게 물들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입가엔 바짝 마른 미소를 걸어둔 채로, 그럭저럭 행복한 날들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면 마음만큼은 편해질 거라고 믿는다. 어쩌면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근거라고 부를 건 글쎄 아무것도 없어서, 믿음의 뜻이 자꾸만 흐리멍덩해지는데 어쩌겠어. 행복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란 건 없다고들 하니까, 나의 믿음이 절뚝거리는 듯이 보여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놓아줬다.


내일을 잊어버릴 먼 훗날까지도 나를 괴롭게 만들 일을 놓아주니, 꽤나 너그러운 기분이 들긴 한다. 이쯤에서 놓아주는 것은 치유라고 발음해 봅니다. 남들에게도 권할 수 있는 방법이겠는지 생각해 봤는데_ 이로운 점들 사이사이마다 해로운 티끌이 보여, 이런 방법 따윈 나만 알고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울음이 마른 눈가를 비비지도 않았거늘 눈물이 나왔다. 물고 있던 담배에서 흐르는 잿빛이 조각조각 흩어지질 않고 눈앞을 맴돈 탓이었다. 입가에 걸어둔 바짝 마른 미소가 축축해서 고갤 숙였다. 고갤 숙이자 보인 내 그늘에 언젠가의 약속들이 떠올랐다. 다음을 약속하긴 했는데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은 말뿐인 약속들이 떠올라, 잊고 지냈던 불행을 깨단해버리고 말았다.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일들은 놓아주고, 그만 허구라고 명명하자 작정한 채 마저 살아가는 중이다. 말뿐이었던 약속들은 모두 허구라고 명명했다. 물론 아주 약간이나마 기대를 머금긴 했는데, 기대해야만 하는 일에는 체념하는 편이 마음에 이로웠다.


말뿐이었던 약속들이 정말로 이행된다면 기쁘겠지만, 이미 깊어진 골을 메우는 게 가능하기나 할지 의문이지. 긴긴 공백의 존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는: 아직도 어정쩡한 엄마와의 생활로 깨우쳤다. 이쯤에서 놓아주는 것은 치유라고 발음해 봅니다.


남들에게도 권할 수 있는 방법이겠는지 생각해 봤는데_ 해로운 바늘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이런 방법 따윈 나만 알고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입가에 걸어둔 바짝 마른 미소가 축축해서 고갤 숙였다. 고갤 숙이자 보인 내 그늘에 언젠가의 약속들이 떠올랐다.


다음을 약속하긴 했는데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은 말뿐인

약속들이 떠올라

잊고 지냈던 불행을 깨단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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