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정거장

아무런 기약 없이 희망을 찾고 있어.*

by 서리달

너는 지나간 일을 돌아볼 때마다 몽글몽글한 기분이 든다 말했고, 그런 아기자기한 표현을 듣고 있던 나는 막연하기만 한 부러움을 느꼈다.


어쩌면 내게도 그런 기분을 들게 하는 추억거리가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꾸며낸 웃음 뒤로 지나간 일들을 휙휙 넘겨봤지만 허튼 짓거리였다. 원래부터 그런 추억거리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너무 빨리 넘겨댄 탓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걸까. 너와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추억거리는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그저 꾸며낸 웃음이 느슨해지는 감각만이 조금 더 분명해져서, 풀어진 나사를 조이듯이 미소를 지어내며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지. 너와 내가 마주 앉은 카페에선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같은 교복은 아니었지만 각자의 현실을 상징하는 옷을 입은 채, 학생증으로는 너무 짧은 밤이 아쉬워 밤길을 헤맸던 어느 시절. 쓰임새가 시원찮은 공원 벤치에 앉아, 너와 내가 함께 흥얼거렸던 그때 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커피가 어려워서 어른이 되긴 글렀다던 너는: 다 식어버린 얼그레이를 한 모금, 머금고 있다가 삼키더니 오랜만이라는 감상을 덧붙인다. 고갤 끄덕이며 너의 표현을 모방하던 나는, 어느새 이렇게나 달라져버린 우리의 모양을 한껏 체감했다. 너무나도 먼 계절이 돼버린 듯한 그때가 하나씩 테이블 위에 내려앉는다.


일주일에 두 번쯤, 별다른 일정이 없는 때마다 하릴없이 어울렸던 것. 그 덕분에 시답잖은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던 것과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았던 우리 둘의 모양. 단골처럼 드나들었던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소설과 노래, 영화 이야기로 때웠던 시간.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아 아쉬울 때면 머물렀던 어두운 공원. 테이블 위에 그때를 하나하나씩 올려두며 너는: 지나간 일을 돌아볼 때마다 몽글몽글한 기분이 든다 말했고, 아기자기한 표현을 듣던 나는 또다시 막연한 부러움을 느꼈다.


그런 기분을 들게 하는 추억거리가 없던 게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두고, 어디까지나 지나간 일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이 마음이 문제였다. 때문에 나는: 풀어진 나사를 조이듯이 미소를 지어내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지.






내려둔 커피가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겨울날의 오후. 담배연기를 보내주려 열어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발끝이 적당히 시린 게 그럭저럭 신선한 기분이었다. 냉장고의 맨 아래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귤이 바로 이런 기분이겠는지. 드문드문 짐작해 봤는데 이런 나와 어울리는 건 아마도, 그 옆에 투박하게 구겨 넣은 싸구려 원두일 거라고 단정했다.


처음의 계획에서 완전히 경로를 이탈해 버린 문장들을 바라본다. 5분 전에도 태웠던 담배를 한 개비 또 깨물고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는 문장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읽어도 단정하지 못하다는 감상이 담배연기에 뒤섞이는 겨울날의 오후. 차라리 다 지우고 다시 처음부터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시원스레 그러기에는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애꿎은 담배필터만 잘근잘근 씹었다. 경로를 이탈한 채 이리저리 헤매는 문장들이 너무나도 나다워서 문득 슬퍼졌다.


희망을 묻는 누군가의 물음에다 ‘잘 쓰는 것보다는 나답게 쓰고 싶다’고 말했던 찰나가 떠올랐는데, 지금의 기분에 그때를 겹쳐보면 그렇게 적절한 대답은 아녔던 것도 같지. 실컷 나다운 무언가를 써내긴 했지만 손톱만치도 기쁘지 않았다. 처음의 계획에서 이탈해도 너무 이탈해 버린 탓이겠지. ‘나’와 ‘계획’은 공존할 수 없는 사이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돋아났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계획적이라는 건 철저하게 나를 외면하는 일이 되는 걸까.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생각을 두고 처분을 고민하다, 담배필터나 또다시 잘근잘근 씹어댔다. 내려둔 커피가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겨울날의 오후. 담배연기를 보내주려 열어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고, 발끝이 꽤나 시려서 이럭저럭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의 맨 아래에 투박하게

구겨 넣은

싸구려 원두가 된 것만 같은 기분.


처음의 계획에서 완전히 경로를 이탈해 버린 문장들을 바라봤다. 반복되지 않을 과거에 머물며 다시 그러하길 바라는 미래를 그리지만, 끊임없이 지금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측은함이 곳곳에 만연했다.


비참이란 단어의 뜻이 너무나도 선명해져서 각별해지기 일보직전. 희망을 묻는 누군가의 물음에다 ‘잘 쓰는 것보다는 나답게 쓰고 싶다’고 말했던 찰나가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나의 지금은 과연 그때 말했던 그대로 이뤄진 지금이겠는지. 노트북 너머의 하얀 벽을 바라보며 고민해 봤는데, 반은 이뤘지만 반은 이뤄내지 못했다면서 단정할 수 있었다. 과정이나 모양이 어떠하든 간에 나답게 쓰는 일상이니까. 반절은 이뤘다고 한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


물론 이러하다고 해서 이 마음이, 아주 기쁘다거나 한없이 행복한 것도 아니지만 어쩌겠어. 바라왔던 나에서 멀어지긴 했어도 지금의 나를 알고 있음에 다행이라며 안도하기로 했다. 내려둔 커피가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겨울날의 저녁. 담배연기를 보내주려 열어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고, 발끝이 꽤나 시려서 이럭저럭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경로를 이탈한 채 이리저리

헤매는 문장들이 너무나도 나다워서 그랬다.






꽤나 멀어져 버린 그 겨울에 했던 짐작은 알고 보니 예언이었습니다. 어떤 겨울이 오더라도 나는 당신들을 다르게 볼 수 없을 거라고, 그리 짐작했었는데 많은 시간을 견뎌낸 오늘에 그때를 돌아보니. 그때의 짐작은 짐작이 아닌 예언이었습니다. 또 몇 마디를 덧붙이자면 다르게 볼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아주 없는 듯이 살아갈 수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시절과 어느 계절에 내어줬던 곁을, 다른 누군가로 채워내다가 이내 깔끔하게 비워내도 저는: 끝끝내 부재중인 당신들을 떠올려버리곤 했습니다.


물론 이제 더는 몇 년 전처럼 마음이 아프다든가, 하늘 없는 듯이 서럽다든가 하진 않지만 뭐라고 할까요. 몹시도 아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후에 찾아오는 허전함이 지독해졌다고 적어내면 괜찮을까요. 하여튼 간에 오늘도 저는 다르게 볼 수 없는 당신들을 방금도 떠올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때때로 아주 없는 듯이, 그때의 당신들을 다 잊은 듯이 살아가기도 하는데 부는 바람이 차가워진 즈음. 혹은 그때를 닮아있는 무언가를 바라볼 적이라면 어김없이 당신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꽤나 멀어진 그 겨울에 이렇게 될 미래를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면 농담 같을까요. 부디 답을 듣고 싶지만 하늘 아래에선 답을 들을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아, 입에 머금고 있다가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꽤나 멀어져 버린 그 겨울에 했던 짐작은 알고 보니 예언이었습니다.


어떤 겨울이 오더라도 나는 당신들을 다르게 볼 수 없을 거라고, 그리 짐작했었는데 많은 시간을 견뎌낸 오늘에 그때를 돌아보니. 그때의 짐작은 짐작이 아닌 예언이었습니다. 또 몇 마디를 덧붙이자면 다르게 볼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아주 없는 듯이 살아갈 수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시절과 어느 계절에 내어줬던 곁을, 다른 누군가로 채워내다가 이내 깔끔하게 비워내도 저는: 끝끝내 부재중인 당신들을 떠올려버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다음 겨울, 또는 다음에 덧붙여진 또 다른 다음 겨울에도 이와 같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솔직히 이것만큼은 부디, 틀린 짐작이길 바라는데 어떻게 될지는 더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지요. 때문에 저는: 풀어진 나사를 조이듯이 미소를 지어내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게

내 일이라서,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일 것 같네요.



*G-DRAGON - 1년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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