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나간 꿈과 착각 속에 빠져 사는
툭툭 잘라둔 나무를 보게 될 적이면
막연하게 소리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아마도 이건 북과 장구 앞에 앉아있었던 시간에서 비롯된 버릇이겠지. 징이라든가 쇠를 제외하면 나무로 만들어진 게 많았으니까, 징이나 쇠를 두드리는 채도 결국은 나무였으니까. 툭툭 잘라둔 나무를 보게 될 적이면 너무나도 막연하게 소리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긴 듯하다. 물론 소리라고 해서 현악기나 관악기가 내는 소리처럼 고운 소리를 떠올리는 건 아니다. 투박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낮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를 떠올리곤 한다. 흔한 타악기의 소리지. 북소리와 장구소리를 떠올린다고 하면 편할 거다.
하여튼 어느 건설현장, 또는 목공소 앞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나무토막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소리를 떠올리는 버릇을 갖고 살아간다. 바라보고 있는 나무토막들이 악기에 쓰일 나무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만 알면서 말이다. 사람의 편의를 위한 도구가 될 목재에도 그 나름의 소리가 있지 않겠냐는 식이다.
아마도 이건 북과 장구 앞에 앉아있었던 시간에서 비롯된 버릇이겠지. 징이라든가 쇠를 제외하면 나무로 만들어진 게 많았으니까, 징이나 쇠를 두드리는 채도 결국은 나무였으니까. 툭툭 잘라둔 나무를 보게 될 적이면 너무나도 막연하게 소리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긴 듯하다. 덧붙여 그 소리를 나무의 언어라고 믿는: 근거도 불충분한 믿음까지 생겼지.
어쩌면 그 시절의 나는 연주가 아닌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툭툭 잘라둔 나무를 볼 때마다, 이젠 완벽한 흑백사진이 돼버린 그때를 돌아볼 때마다 생각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초심이란 말과는 너무나도 먼 곳에 멈춰있었다. 실은 멈춰있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꼬락서니였다. 크게 자빠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듯한 꼬락서니인데 이런 꼬락서니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라고 말해봤자 내 꼬락서니만 더욱 우스워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주변에 있다가도 없는 사람들은 이런 내게 변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입을 꾹 다물고 저기 먼 곳에 덩그러니 놓인 초심을 바라봤다. 손을 뻗으면 닿긴 할까, 생각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먼 곳이었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변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자조했다. 그러자 마른 입가가 찢어졌다.
계절은 아직도 여름인데 입가는 겨울 아니면 환절기의 일상처럼 메말라갔다. 웃어야 복이 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유를 막론하고서 한 번 웃어보는 것조차 통증이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변했다는 말이 내 속에서 맴도는 이유를 나름 알 것도 같았다. 주변에 있다가도 없었던 사람들의 눈은, 여태껏 내가 짐작해 왔던 것보다 훨씬 정확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꾹 다무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라고,
찢어진 입가의 근거를 덧붙였다.
난 늘 그대로일 거라던 게으른 믿음이, 뿔뿔이 흩어져 흘러나온 자조 때문이라고는: 입이 찢어지더라도 말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초심이라는 말과는 너무나도 먼 곳에 넘어져있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것도 좋은 거라고 여느 책에서나 나올 법한 생각을 닦아댔는데, 그런 것도 뭔가 이뤄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사실쯤. 찢겨나간 꿈과 착각 속에 빠져 사는 나여도 알 수 있었다. 당장 하나라도 더 이뤄내야 멀쩡한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처지였으니까. 그런 말의 담지자는 내가 될 수 없었다.
막연함 위로 조급함이 내려앉았다.
초심으로부터 한 발자국 더 멀어졌다. 사람이 변하는 이유는 지구의 기울어진 자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부디 오답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주변에 있다가도 없는 사람들은 이런 내게 여전하다고 말했다. 입을 더욱더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전하다는 게 좋은 건지 변하는 게 좋은 건지 헷갈렸다. 있다가도 없는 사람들은 알고 보니 한 입으로 두 말이나 할 줄 아는 능력자였다. 나는 처세에도 재능이 없었다.
타고난 무능이 여전해서 적당히 안도했다.
그럼에도 입을 꾹 다물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든가, 나는 이런 사람이라든가 하는 말의 효용이 아리송했다. 뜻 없이 자조를 거듭했다. 그러자 아물고 있던 마음이 죽 찢어졌다. 계절은 아직도 여름인데 마음은 겨울 아니면 환절기의 변덕처럼 메말라갔다. 웃어야 복이 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_
이유를 막론하고서 한 번
웃어보는 것조차 통증이었다.
문장을 엮는 밤은 꽤나 지루해서
하품과 한숨이 번갈아 작동합니다.
눈에 익숙한 단어가 지긋지긋해서 울림이 낯선 단어로 바꿔도 지루함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이거면 좋다는 확신보다는 이게 뭐지, 싶은 의심이 짙어져서 그럴 겁니다. 의심이라는 게 본디 다채롭긴 해도 너무 반복되고 거듭되면 지루해지기 십상입니다.
이런 밤의 제가 딱 그런 모양입니다. 엮고 있는 문장의 곳곳이 의심스러워, 알고 있는 단어와 단어를 번갈이 끼워 넣곤 하는데_ 그러면 그런 만큼 하품과 한숨이 번갈아 작동할 뿐입니다. 아무래도 글자놀이에 천재적인 재능은 없는 게 확실한 듯합니다.
나처럼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중에 비교적 괜찮은 결과를 이룩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고 있으면 공감도, 이해도 어려운 부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문장의 재료로 쓰일 단어의 선별, 이에 관해 듣고 있으면 유난히 그러했습니다. 왠지 이게 어울릴 것 같아서, 라든가 이 단어 말고는 떠오른 게 없어서, 라는 식의 말을 하시던데 공감도 이해도 어렵고 그저 내가 엮어낸 것들에 대한 의심만 깊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랬습니다.
여태까지 확신으로 엮었던 문장들이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라는 안도감이 엮어낸 문장에 엉키는 감정으로는 최선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엮어낸 문장에는 늘 의심만 엉켰습니다. 그런 나날을 거듭한 끝에 이윽고 머물게 된 오늘 밤. 문장을 엮는 이 밤도 역시 지루해서 하품과 한숨이 번갈아 작동합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 오늘이, 오늘이 아니게 됐지만 잘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안도할 만한 문장도 엮지 못했으니까요. 눈에 익숙한 단어가 지긋지긋해 울림이 낯선 단어로 바꿔봤습니다. 역시나 지루함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가 이게 뭐지, 싶은 의심이 조금 전보다 더욱더 짙어져 그럴 겁니다.
의심이라는 게 본디 다채롭긴 해도 너무 반복되고 거듭되면 지루해지기 십상입니다. 이런 밤의 제가 딱 그런 모양입니다. 엮고 있는 문장의 곳곳이 의심스러워, 알고 있는 단어와 단어를 번갈이 끼워 넣곤 하는데_ 그러면 그런 만큼 하품과 한숨이 번갈아 작동할 뿐입니다. 아무래도 제겐, 글자놀이에 천재적인 재능 따윈 없었던 게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근데 그런 것치곤
너무 오래 부여잡고 살았네요.
*미모사:
콩과에 속하는 브라질 원산의 키 30cm가량의 식물로서 여러해살이풀. 대한민국에선 겨울에 기온이 낮아 한 해 밖에 못 사는 일 년생 초본이다. 잎을 건드리면 밑으로 처지고 소엽이 오므라들어 시든 것처럼 보인다. 밤에도 잎이 처지고 오므라든다.
꽃말은 민감, 섬세, 부끄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