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막연했던 내일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by 서리달

그럼에도 괜찮다, 는 말 또한 결국 그럴듯한 근거가 뭔가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버릇처럼 내뱉어봤자 자신의 가치만 염가에 거래될 뿐이었다. 스물의 여름, 물류트럭에서 떨어져 어깨를 부여잡은 날. 찌푸린 인상에 전전긍긍하며 괜찮아요, 라고 말할 게 아니라 욕 좀 얻어먹더라도 나는:


병원을 갔어야 더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5년 후에야 깨단했을 때, 길이와 무게가 더 지독해진 한숨엔 회색이 더 깊어졌었지. 그럼에도 괜찮다, 는 말은 뱉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천성이 긍정적인 건 좋은 일이겠지만 마땅한 근거도 없이 부여잡은 긍정은 혹사였다. 덧붙여 자기착취였고 나아가서는 가치의 추락이었다. 그런 말을 뱉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근거가 뭔가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버릇처럼 내뱉어봤자 자신의 가치만 염가에 거래될 뿐이었다. 스물의 여름, 왼쪽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나르던 박스들. 거기에 짓눌린 끝에 납작해진 건 지켜내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다.


소리를 다루고 싶었던 미래였고,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던 너였고,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날의 하늘은 파랑이었다. 나를 붙잡아주지 않았던 트럭도 같은 색이었고, 그때의 내 마음은 억만 시름에 오염된 회색이었다. 그럼에도 괜찮다, 는 말은 뱉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뱉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근거가 뭔가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버릇처럼 내뱉어봤자 자신의 가치만

염가에 거래될 뿐이었다.






누군가가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을 물을 때면 되도록 지금으로부터 가장 먼 시절을 답하곤 했었다. 서글픈 대답의 근저는 언제나 복기였다. 계가*조차도 사치스러운 삶이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틀린 건지 알고 싶은 무력함이었다. 뭘 어떻게 바꾸고 싶다, 그때가 많이 그리웠다, 같은 감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력한 궁금증뿐이었다.


정말로 어느 시절에 되돌아가서 바꾼다고 해서 쉽게 바뀌거나 달라질 삶이 아닌 것 같았고, 딱 짚어 어느 시절의 어느 선택이 문제였다고 말하기에는: 그때의 나는 나름의 최선을 선택했던 것일 테니까. 서글픈 대답의 근저는 언제나 복기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국엔 나도 사람이라서 바꾸고 싶은 선택들이 있기야 있는데_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거늘 어쩌겠나. 어쨌든 다 좋았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간에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고 믿는다.


이렇게 믿는 만큼

딱 그런 만큼씩 무력해지고 마는

누더기 같은 마음이겠지마는


무언가를 어떻게 바꾸고 싶다, 그때가 많이 그리웠다, 같은 감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날씨와 컨디션에 따라 아직까지도 욱신거리는 어깨를 부여잡을 때도, 지켜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모든 것들이 문득 그리워져도 나의 대답과 그것의 근저는 달라질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가장 먼 어느 시절로 만약에 정말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마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아니, 바꾸지 못할 것이다.


저절로 그렇게 됐던 것들과 원인과 결과로 나열된 사건들에 체념해 버린 마음 때문이겠지. 계가조차도 수치스러운 삶에는 자초지종을 위한 복기면 충분할 거다. 때문에 뭘 어떻게 바꾸고 싶다, 그때가 많이 그리웠다, 같은 감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력한 궁금증뿐이었다. 정말로 어느 시절에 되돌아가서 바꿔보겠다고 해서 쉽게 바뀌거나 달라질 삶이 아닌 것 같았고, 딱 짚어 어느 시절의 어느 선택이 문제였다고 말하기에는: 그때의 나는 나름의 최선을 선택했던 것일 테니까. 서글픈 대답의 근저는 언제나 복기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내 모습과 마음이 어떠하든

이미 다 지나가버린 일들뿐일 테니까.






줄곧 까맣다고 여겨왔던 밤하늘이 실은

쪽빛이었다는 사실을 깨단했던 어젯밤.


한숨에 등 떠밀린 잿빛이 먹구름이 됐지만 다행히도 슬픔이 모자라 비는 내리지 않았다. 울적한 모양으로 둥글어지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흩어졌을 뿐. 내 그리움은 아직 그 정도로 슬픈 게 아니었다. 두 번 다신 파랗게 물들 수 없는 지금이라고 믿었건만, 쪽빛 밤하늘이 그나마 위로가 됐던 걸까. 파랑을 스무 번씩 덧칠한 듯한 밤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내 그리움은 울적한 한숨으로 그쳤다. 다행이었다.


계가조차 수치스러운 삶에 진절머리가 나버린 참에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왈칵 울어버릴 뻔했는데, 파랑을 스무 번씩 덧칠한 듯한 밤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꾹꾹 참아왔던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려 봤다. 마냥 막연한 내일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역시나 달라지지 못했다.


아주 작은 사소함이면 충분하단 듯이 다음을 바라보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잔뜩 멀어진 스물의 여름에도 그랬고, 아홉 번의 해가 겹쳐진 오늘에도 이러하다. 스스로를 긍정적이라고 여겨본 적은 없는데 원체 비관적인 만큼 사소함이면 충분했던 걸까. 어쩌면 이런 천성이었던 탓에 진작 끊어졌거나 권태로웠을 삶이 아직까지도 목적에 따라 운행되는 듯하다.


밤하늘의 삶 또한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한낮의 삶은 밤하늘이 지켜왔던 쪽빛을 본 적도 없겠지만 잠들지 못하는 당신들의 시선에 밤하늘은: 그 소박한 시선이 다정해 내일을 약속해 왔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덕분에 내 그리움은 울적한 한숨으로 그칠 수 있는 거겠지.


계가조차 수치스러운 삶에 진절머리가 나버린 참에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왈칵 울어버릴 뻔했는데, 파랑을 스무 번씩 덧칠한 듯한 밤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꾹꾹 참아왔던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려 봤다.


마냥 막연하기만 했던 내일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쪽빛: 짙은 푸른빛.

*계가(計家):

바둑에서, 대국이 끝난 후 서로 간에 집(家)을 세는(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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