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장

끊임없이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는 중.

by 서리달

무얼 먹으면 좋겠는지 고민이 길어지면 그냥 굶어버리기로 작정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 어떻게 봐도 못난 버릇인데 쉽게 고쳐지질 않는다. 곁에 머물던 사람들이 몇 번씩 나무라도 횟수에 맞춰 맞장구만 쳐줄 뿐, 내 버릇은 고쳐지질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


방금도 나는 그런 작정을 했다. 하루의 첫 끼이자 마지막이 돼버린 저녁을 두고 무얼 먹으면 좋겠는지. 갖가지 메뉴를 떠올리다가 아직은 잔잔한 허기를 이유로 굶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김치찌개는 틈만 나면 먹었고, 제육을 만들자니 쓸데없이 큰 손이 양을 조절하지 못하니까 탈락. 배달음식을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해 봤지만, 이후에 나올 쓰레기를 떠올리면 입맛이 뚝 떨어져서 그냥. 이런 참에 굶어버리기로 작정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배가 고픈 게 아녔는지도 모르겠다. 먹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유로 메뉴를 고르고 있는 게 그렇게만 느껴졌다. 아주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게 눈앞에 있어도 가지려 하지 않는 습성이 깊었다. 최소한으로도 만족하곤 했던 어제들을 지나온 탓일까, 아니면 타고나길 이렇게 타고나서 그런 걸까.


어떤 날 문득 깨단케 된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허전하다는 이유라든가, 때가 됐다는 이유로 먹질 못하는 사람이었다. 얕기만 한 허기에 때가 됐다는 이유로 무얼 먹으면 꼭 상한 음식이라도 먹은 듯이 체하기 십상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리에서도 그러했지. 마주앉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먹을 기분이 아닌 순간에도 똑같이 그랬다.


편식이 심한 편은 아녔는데 조금은 다른 쪽으로 편심이 극심한 사람이었다. 내 기준과 기분이 아니라면 먹질 못하는 사람, 애매하게 속이나 채울 바에야 차라리 굶어버리겠다고 작정하는 사람. 어떻게 봐도 못난 버릇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의 나였다.






구름의 유동성은 착실함이 밑천이었다.


게을러빠진 듯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듯이 느껴질 만큼 느리지마는: 문득 깨닫고 보면 저만치 나아가있는 게 구름이었다. 그렇게 느려서는 어디에도 못 갈 거라고 비관해 봤자, 착실함을 밑천으로 한 유동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을 뿐이었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과 건물 틈, 그 사이에 멈춰있는 줄 알았던 구름이 떠나고 보이게 된 푸른 하늘. 오늘은 푸른 하늘을 보긴 글렀다며 포기했던 게 짐짓 부끄러워지는 찰나에 깨단한 하나였다. 구름의 유동성은 착실함이 밑천이었다. 게을러빠진 듯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듯이 느껴질 만큼 느리지마는: 문득 깨닫고 보면 이미 떠나고 없는 구름이었다.


추구하는 만큼 빠르지도 못하면서, 빠르지 않은 것들을 보며 비관하던 버릇이 더 볼품없어졌다. 단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흘러가는 구름이, 비관에 찌들어 사는 나보다 건설적인 삶을 사는 듯이 보이는 저녁의 어느 어름. 첫 문장은 오후의 초입에 썼지만 아직도 반절이나 남아있는 여백을 바라보다가 자조自嘲*했다.


그렇게 느려서는 어디에도 못 갈 거라고 비관해 봤자, 착실함을 밑천으로 한 유동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을 뿐이었지. 게을러빠진 듯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듯이 느껴질 만큼 느리지마는: 문득 깨닫고 보면 이미 떠나고 없는 구름이었다.


느려터진 구름의 유동성보다

게을러빠진 건 나의 의욕이었다.






헤매듯이 헤아리기를 거듭하다 문득, 깨닫고 보면 여기에 없는 것들의 윤곽마저 흐려져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각별했든 그게 아녔든 간에 먼 훗날까지, 생김새만큼은 또렷이 기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녔습니다. 찬바람 불어올 적마다 떠오를 부재라고 생각했던 당신도, 언제부턴가 가물가물해져서는 키가 작았는지 컸는지도 헷갈리게 됐습니다.


알음알음 과거에 기록해 둔

일기 같은 단편들을 헤집어야, 겨우겨우

당신을 유추해 낼 수 있는 요즘입니다.


키는 나보다 작았고, 빡빡 깎아둔 머리를 했었고,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들려줬었고, 풀과 꽃의 이름과 뜻을 잘 알았던 사람. 여태 적어왔던 단편들을 헤매듯이 헤아려야지, 그렇게나마 얼마쯤의 당신의 윤곽이 잡히곤 합니다. 기억이란 본래 묻어두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만큼, 이럭저럭 노력을 기울이면 언제든 떠올릴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_


아무래도 그게 아녔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건 적절히 비워내고, 적절히 채워지길 반복하는 그릇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먼 훗날까지 또렷이 기억할 줄 알았던 전부가 이토록 흐려져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돼버릴 오늘을 대비하기 위해 저는: 끊임없이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는 중이었던 것이라고,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하는 중이었다고 말해봅니다.


조금 넓어진 방의 모서리엔 종이박스가 여럿 쌓여있습니다. 그 안에는 내가 지나온 날들이 담겨있습니다. 어렸을 적의 내 모습을 모아둔 앨범,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 상장과 한 시절의 열정이었던 가락보와 장구채가 담겨있습니다. 특별한 날에 매겠다던 당신의 나무색 넥타이도 그 안에 있고요.


한겨울에 마음이 아주 적적해진 날엔 그 상자를 열어보곤 하는데, 한 번 열기 시작하면 시간을 너무 잡아먹어버려서 자주 열진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증명하는 먼지부터 시작해, 하나씩 꺼내 보고 있으면 잊어버린 것들을 어떻게든 떠올려야만 할 것만 같아서 자주 열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열어봤던 건 작년 겨울이었습니다. 이사 이후에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던 새벽이었지요. 그날의 새벽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습니다. 하나씩 꺼내 잊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더군요.


덕분에 다음날 저녁까지

정리했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았고, 기억이 났더라도 윤곽이 흐려진 게 너무 많아서 고역이었습니다. 그럭저럭 각별했든 그게 아녔든 간에 먼 훗날까지, 생김새만큼은 또렷이 기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녔습니다. 찬바람 불어올 적마다 떠오를 부재라고 생각했던 당신들도, 언제부턴가 가물가물해져서는 키가 작았는지 컸는지도 헷갈리게 됐습니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건 적절히 비워내고, 적절히 채워지길 반복하는 그릇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먼 훗날까지 또렷이 기억할 줄 알았던 전부가 이토록 흐려져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돼버릴 오늘을 대비하기 위해 저는: 끊임없이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는 중이었던 것이라고,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하는 중이었다고 말해봅니다.




*구름장: 넓게 퍼진 두꺼운 구름 덩이.

*자조(自嘲): 자기 스스로를 비웃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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