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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니 Mar 20. 2023

대 포기의 시대

대 정보화 시대 속 포기에 대한 고찰. 

 대 퇴사의 시대('the Great Resignation')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영미권의 젊은 세대(소위 MZ) 조기 퇴사율이 증가해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도 젊은 세대의 조기 퇴사율이 크게 증가했다고 여러 구인/구직 서비스 플랫폼 기업들이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퇴사뿐 아니라 포기하는 일 자체가 만연한 것 같다. 이혼도 점점 늘고,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아 서구권과 OECD 국가는 대부분 인구 감소 추세를 면하기 어렵다고 한다. 대략 10년 전부터 대한민국 젊은 세대를 N포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던 걸 보면, 포기가 만연해진 것은 예상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젊은 세대를 보는 시선은 주로 곱진 않다. 포기는 정말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포기하는 것은 훌륭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대에서는 개인에게 무궁무진한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연결 수준이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아진 시대이기 때문에, 어떤 경로를 통해 개인에게 좋은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 지인들, 회사 동료들과 긴밀히 연결됐던 과거에 비해(densely connected) SNS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등을 통해 그 강도는 약하지만, 더 멀리 뻗는 연결 관계들이 엄청나게 많이 형성되었다(sparsly connected). 이전에는 내 필요를 채워줄 사람(기회)이 주변에 전무했다면, 이제는 어디서 누가 내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불가능!' 이라고 딱 답이 나오던 상황이 '모름!' 이 됐다고나 할까. 지금의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기회에 걸어보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다.

 

 포기하면 더 빨리 시작할 수 있다. 하기로 되어있는 일들을 다 하지 않고 끝을 내기 때문이다. 유튜브 동영상 하나를 보는 걸로 치면, 보다가 중간에 끄는 것이다. 영상의 중간, 끝 부분을 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끝은 난다. 영상을 정주행을 했건, 띄엄띄엄 봤건, 중간에 닫았건, 결국 끝났다는 점에서는 같다. 영상이 하나 끝나면, 우리는 주로 다음 유튜브 영상을 보곤 하는데(아니라구요??? 선생님??) 직접 찾아서 보기도 하지만,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영상들 중에서 골라 새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시 아는가, 추천받은 영상들을 중간에 꺼버리는 선택이 알고리즘으로 하여금 더 먼 곳에서 딱 좋은 영상을 물어다 줄 지. 실제로 Netflix의 추천 시스템은 사용자의 암묵적인 반응(영상 시청 후 직접 매기는 평점이 아닌, 영상을 보는 방식 자체)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는다. 분명한 것은, 빨리 끝내면 다음 시작이 빨라지고, 어떤 때에는 원하는 것을 더 빨리 얻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포기는 정말 잘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포기하는 순간의 내 모습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단순히 힘들다는 이유로 도피하는 모습이라면, 다음 시작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의 반복은 힘이 세다. 힘든 상황 속 무기력함과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다가 포기하는,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새로운 시작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될지 모른다. 고민 없이 금방 포기하는 습관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이미 포기를 결심했다면, 영광의 순간을 어떻게든 만든 뒤(어쩌면 정신 승리로라도?) 포기하는 게 어떨까.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마무리 짓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는 긍정적인 모습. 그 모습은 잘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포기하면 빨라'라는 말을 자주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길 바라는 학생들 중에서는, 그 성실함과 실력이 매우 뛰어났던 편이다. 모의고사를 보는 등 체력 소모가 극심한 일과를 마친 뒤에도 하루치 공부량을 정확히 해내는 참 성실한 친구였다. 그 친구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다른 친구들을 보고 '포기하면 빨라'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정작 말하는 본인은 포기를 모르니 사람이었으니 그냥 우스갯소리였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포기하면 빨라'라는 말이 재밌었는지, 나는 자주 그 말을 되뇌며 살아왔다. 학부에서 어려운 과목을 들을 때, 시험을 준비할 때, 대학원 과정이 힘들 때 등. 돌이켜보면, 그때 포기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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