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1시 50분이야. 좀 있다 차 가겠어!"
"좀 빨리 애들한테 용돈 좀 줘요."
나와 언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를 재촉했다. 엄마는 그런 우리가 안쓰러워 아빠에게 빨리 용돈을 주라고 다그치셨다. 하지만 아빠는 끝까지 고개를 돌리고 못 들은 척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다.
2시면 차가 떠나는데 그때까지는 용돈을 받아야 하는데...
언니와 나는 정말 식은땀이 났다.
시골에 살던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언니는 중학교 1학년까지 통학을 하다가 2학년이 되어서 동네 언니와 함께 자취방을 얻었다. 그리고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언니와 함께 자취를 하게 되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무슨 자취를 하겠냐고 하겠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통학이 힘들어 읍내에서 자취를 하는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새벽 6시 40분 버스를 놓치면 그 다음 버스는 2시간 뒤인 8시 40분 버스였다. 그러니 첫 차를 놓치면 지각은 따놓은 당상이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걸어서 20분에서 25분 정도 걸린다. 그러니 첫 차를 타려면 늦어도 집에서 6시 20분에는 나와야 정류장까지 뛰어서 겨우 탈 수 있었다.
새벽밥을 먹여 보내는 엄마도 힘들고, 우리도 힘들었다. 그렇기에 아빠의 반대에도 엄마는 우리가 자취하는 것에 손을 들어주셨다.
아빠가 반대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자취를 하면 통학하는 것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적게라도 살림살이는 다 갖춰야 하고, 월세도 내야 하니 아빠로서는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작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는 아빠의 주머니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와 언니의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취라고 하면 마냥 재미있을 것 같지만, 아침 식사부터 시작해 점심도시락도 직접 만들어야 했고, 하교 후 교복을 씻어 다음날 입을 수 있도록 빨아서 다림질해 놓는 것까지 모두 손수 해야 했다. 자취라고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오는 금요일만 기다린 사람처럼 아빠는 주말 내내 우리에게 농사일을 시켰다. 나는 그 부분도 불만이 많았다.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들은 어쩌다 한 번씩 밭농사일을 도와줄 뿐 부모님이 농사일을 많이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우리들이 노는 꼴을 못 보는 사람같이 주말 내내 논이고 밭이고 함께 했다.
당시 우리 동네는 버스가 하루에 한 대만 들어왔다. 아래 동네까지는 1시간에서 1시간 30분 단위로 버스가 들어왔지만, 우리 동네까지 들어오는 버스는 2시 버스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일요일 오전까지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준비하면 딱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자취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2시 차를 타고 읍내에 나갔다.
자취를 하다 보면 이것저것 사야 할 것이 많다. 도시락 반찬도 사야 되고, 학교에서 필요한 물건도 사야 한다. 그렇기에 아빠에게 필요한 금액을 얘기하면 아빠는 절대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차가 떠날 때까지 주지 않고 버티다 결국 1~2만 원을 주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언니는 울면서 버스를 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엄마는 아빠 몰래 쌀과 콩 같은 돈이 될 만한 곡식들을 조금씩 차에 실어주셨다.
쌀과 콩은 가져왔지만, 중학생인 우리가 어디에 팔 것인가? 다행히 막내 이모가 읍내에 있어서 이모가 지인들에게 많이 팔아주었고, 좀 더 세월이 지나서는 이모가 옷가게를 내면서 옷가게 손님들에게 엄마가 농사지은 고춧가루, 깨 등을 팔아주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다 옛날 이야기다. 하지만 아빠의 구두쇠 같은 성격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없어지지 않고 아직도 꼭 부여잡고 있다. 아니, 더 꽉 잡고 있어서 그런 아빠를 보며 엄마는 이제 지쳤다고 얘기하신다.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도시락 반찬 살 돈도 제대로 안 주는 남편이 얼마나 미웠을까? 나도 그때는 아빠가 정말 미웠다.
아빠 몰래 우리에게 돈을 찔러주던 엄마의 손길...
그 돈을 구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지, 아빠 몰래 숨기려고 얼마나 눈치를 봤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온다. 지금도 아빠는 여전히 돈 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엄마도 이제는 엄마 통장을 만들어서 나름대로 용돈을 모으면서 아빠 눈치 안 보고 돈을 사용한다. 이제 돈 나올 구멍이 아빠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과 얼마 안 되지만 우리가 주는 용돈으로 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며 크게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빠가 용돈을 안 주려는 모습...
용돈을 못 받아서 울고 있는 나와 언니의 모습...
그런 모습을 더 안타깝게 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
아직도 그 모습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은 안다. 아빠의 그 모습이 단순한 인색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가난한 농부가 자식들의 교육비를 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지, 용돈을 주면서도 "이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셨을지를.
그리고 엄마의 그 손길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도. 아빠 몰래 찔러주시던 천 원, 이천 원이 단순한 돈이 아니라
"엄마는 너희 편이야"라는 메시지였다는 것을.
어쩌면 그때 우리는 돈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빠가 용돈을 안 주려는 모습...
용돈을 못 받아서 울고 있는 나와 언니의 모습...
그런 모습을 더 안타깝게 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