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7 2021.11.4.
의외로 성실한 타입
어제의 한바탕 해프닝으로 인하여 오늘의 휴가는 꿀 같고 너무 감사하다. 오늘은 며칠만 개방하는 스위스 대사관도 가고 새로이 개관한 문화 재단의 사옥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는 시간에 맞추어서 나오기로 했고, 나는 늦잠을 자고 느지막하게 출발하기로 했다.
늦잠을 많이 잔 탓에 직장인의 그리고 나의 약과 같은 커피 한 잔을 못 마시고 나왔다.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기는 했지만 잠이 깨지는 않는다. 친구와 만나기 전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려고 했는데, 꾸물거리는 탓에 도통 시간이 나질 않았다.
친구를 만나서 문화 재단의 사옥을 방문했다. 이 건물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강남 한복판에 문화시설이 생기는 것과 해외 유명 건축가의 한국에서 첫 번째로 선보이는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이 건축가들이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에 잠시 놀랐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커피도 마시지 않았고, 그동안의 긴장들이 피로감으로 자리 잡는다. 게다가 흘러나오는 음악도 한몫을 하고 있다. 잠이 솔솔 오는 음악이다.
우리의 예약시간에는 어느 학교 건축과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도슨트이 운영되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그 무리를 따라다니려고 했는데, 몇 걸음 못 가고 이내 주저앉고 만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전시장 한편에 마련해놓은 의자에 앉아있다. 도슨트 선생님과 건축과 무리가 원숭이 지나보듯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착각이다. 우리 옆에 있었던 건축가들의 수많은 책들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내 곁에 들려오는 말소리, “건축가 학생이고, 이 건축가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이 책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필요한 사람들은 사진 찍으세요.”찰칵거리는 소리들이 이내 들렸고, 그렇게 그 무리들은 우리를 떠나갔다.
그리고 친구와 나는 여전히 무념무상으로 그곳에 앉아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홀연 듯이 일어나 초점 없는 눈으로 그 책들을 사진 찍었고, 친구는 박장대소하였다. 그리고 그 건물이 떠나갈듯이 둘이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니 이제 좀 정신이 차려진다.
왜 사진을 찍었냐는 친구의 말에 선생님이 찍으라고 해서라는 답변을 했다. 그리고 둘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의외로 성실한 타입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과제를, 사회에 나와서는 회사 생활을 하기 싫다면서 울면서 어찌어찌 마무리 했다. 그러니 성차별은 고사하고 성희롱을 그렇게 당하고 사내정치가 심한 이곳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맞아. 나 의외로 성실한 타입. 늘 고민이자 콤플렉스였던 끈기 없음은 울면서 버티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극복하고 있는 것 같다. 약간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나름 성실함을 발견했으니 조금은 괜찮아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