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 2021.12.1.
잘 남겨두자.
이제 퇴사가 30일 남았다. 퇴사가 한 달 남짓으로 다가오면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바로 사례집 때문에…. 이 사례집에는 3년 동안 시행되었던 13개의 사업의 내용들이 담겨야 한다. 박람회를 끝났고 정신없이 진행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를 않는다. 이 사업들은 공무원이 담당하고 있고, 우리 센터에서는 지원 정도만 하고 있는 상태여서 모든 자료를 행정에 요청해야 한다. 하지만 기피 업무에 속하는 이 업무 담당자는 지속적으로 바뀌고 어디에도 자료는 없다.
결국 주민 인터뷰를 나가면, 본인들의 활동이 그리고 본인의 지역이 책자로 나온다는 소리에 주민들은 눈이 말똥말똥 해진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상황만 펼쳐지면 다행인데, 행정에 서운했던 주민들을 만나면 결국 문전 박대를 당하게 된다.
이런 나의 속도 모르고 부장은 중요한 업무가 아니니 괜찮다, 시청 담당자는 관심도 갖고 있지 않으니 괜찮다로 일관하고 있다. 도대체 그놈의 중요한 업무는 어떤 거니? 언제까지 그렇게 을로 살아갈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의 졸작을 만들어 내는 거 같아 속상하다.
얄미운 부장에게 이런 빠듯한 일정으로는 도저히 13개의 사업지 이야기를 담을 수 없으니 같이 나누어서 글을 작성하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안다. 부장은 도저히 쓸 수 없다는 것을…. 한문쌤이 부장이었던 시절, 한문쌤은 나를 붙들고 그의 글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토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샌님이던 한문쌤이 그를 향해 소리 지르던 장면도 익히 보아왔다. 한문쌤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다며 비문이 가득한 그들을 내버려 둔 채 문서의 내용보다 띄어쓰기와 문법을 빨간펜으로 고치는 것이 다였다. 이렇게 배운 실무경력이 전부인 부장은 절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울보 사건을 이후로 나의 눈치를 보고 있는 부장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진짜 할 수 있냐라는 나의 반문에도 그는 물론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건 어느 마트에서 파는 걸까? 졸작의 졸작이 되겠지만, 일단 더 이상 야근을 비롯한 추가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에 일단은 기쁘다.
모든 업무는 내가 다 할 수 없다. 그리고 가지 치듯이 업무를 쳐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무언가를 다 처리하고 나간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니깐 잘 남겨두는 것도 필요하다. 이 회사에서 배운 것은 회사는 누군가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동업하는 자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같이 동업하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 그리고 같이 동업하려고 하는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두자. 하지만 혼선이 발생하지 않게 잘 남겨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