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8 2021.12.3
유종의 미, 그래서 아름다운 미자를 쓰는 거야.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출근했다.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토로하다시피 밤새 쏟아냈다. 결국 둘이 머리를 맞대어서 내린 결론은 갑질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디자인 업체에 양해를 구하고, 그동안 우리와 작업을 해왔던 업체에게 재용역의 형태로 부탁하는 것이다.
부장D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처장님에게 혼나고 디자인 업체에 부탁을 하기로 했다. 굽신거리면서 부탁 아닌 부탁을 하는 나를 향해 디자인 업체는 본인들을 잘 할 수 있다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의 수정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잔인한 말들과 함께 세금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지 않고 일을 하지 않고도 사장님에게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말도 아닌 말로 결론지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내가 원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날이 서있는 말들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처음 해보는 거 같다. 언제나 업무의 결과보다는 같이 일하는 동료, 업체가 중요했다. 그래서 지금은 결과가 썩 좋지 않아도 몇 번을 더 하다 보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했다. 그래서 같은 사무실에 있든, 다른 부서이든, 담당 공무원이든, 업체이든 모두를 동료라고 생각하고 존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나의 철칙은 무참하게 무너져버렸다. 하긴 이 회사에 와서 나는 동료가 아니라 결과를 잘 뽑아내는 숙련된 노예였을 뿐이니, 나도 이렇게 변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싶다.
며칠 전 친한 지인에게 넋두리를 했다. 퇴사하는 그 과정이 너무 지치고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그 지인은 나에게 그래서 유종의 미에 아름다울 미자를 쓰는 거라며 이야기했다. 나는 오늘 결과적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잔인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아름답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는 눈물지었을 테니….
졸작에서 벗어난다는 잔잔한 안도감과 함께, 죄책감이라는 강한 파도가 함께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