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

by 이담

‘나’와 ‘남’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유사하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남’은 다른 이를 지칭한다. 자음 ‘ㅁ’ 하나로 정반대의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이 ‘ㅁ’을 프레임(Frame)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임은 ‘’ 혹은 ‘틀에 넣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틀은 무엇하나 빠져나갈 수 없도록 사방이 막혀있는 네모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깻잎 한 장 차이와도 같은 이 프레임(ㅁ)이 어째서 ‘나’라는 단어에 붙게 된 것일까?


그건 ‘나’라는 행위의 주체가 상대와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비교의 틀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상대와의 비교는 그 사람의 프레임 속으로 나를 집어넣는 것이다.


요즘날 우리는 한 사람의 프레임 속에만 들어가 있지 않고, 여러 사람의 프레임 속에 우리를 가둔다. 네모난 스마트폰 속 네모난 디자인의 앱에 접속하여 네모난 피드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의 프레임에 들어가 끊임없이 비교한다.

비교의 프레임뿐만 아니라 우리는 상대방의 호의를 얻고자 그 사람의 프레임으로 걸어들어가 상대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프레임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의 자존감은 낮아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비교’는 내가 가지지 않은 혹은 가지지 못한 것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지지 않은 것은 갖고 싶은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갖고 싶음에도 다양한 이유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남이 그것을 어렵게 가지게 되었는가, 쉽게 가지게 되었는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상대의 수중에 들려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상황에 부조리를 느낀다.


또한 상대의 프레임 즉, 그의 이상형이 되고자 나를 그 틀에 끼워맞추면 기존의 ‘나’라는 존재는 ‘남’이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상대의 프레임 속에서 나는 아주 약간의 자유의지(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등…)만을 제외한 채, 상대에게 나를 맞추게 된다.


하지만, 계속 그 사람에게 스스로를 맡기게 되면 본래의 ‘나’라는 존재가 상실해가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느끼게 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우리의 자존감은 낮아진다.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아를 존중’하는 것인데 남에게 나를 맞추는 것 자체가 자아를 존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남을 투영시키지 말고, 남에게 나를 투영시키지도 말라. 나에게 남을 투영시키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남에게 나를 투영시키면 상대는 나를 떠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길을 걸어가면 그 길을 같이 걷고자 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나의 뒤를 따라올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동반자’라고 부르는 친구, 연인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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