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being'과 '-becoming'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being'은 불변하는 것 즉,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쉽게 말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악하다의 본성론, 부모, 신체, 장애 등이 있다.
그에 반해 '-becoming'은 "~되어가는"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우리는 being의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집안 형편을 선택할 수 없고, 나의 신체적 결함을 선택할 수 없으며 나의 성별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being의 상태는 내가 처음 세상을 본 두려움에 흘린 눈물이 마르면 becoming의 상태로 변한다.
또한 becoming의 상태가 이어지면 결국 being의 결과가 되며 이것이 인생이 된다. 물론, becoming의 과정이 꽃길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가시밭길이 될 수도있다.
장애를 가지지 않고 태어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될 수도 있으며 가난했던 사람이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될 수도 있다. 나는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그 사람의 선천성보다는 후천적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사건들에 의해 일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피카소가 그의 연인 '도라 마르'를 그렸던 이 작품(우는 여인)은 하나의 프레임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습들이 어우러져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 여인의 옆모습 등 다양한 시점에서의 모습이 어우러져 그녀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예술에서는 이러한 작화 방식을 '큐비즘'이라고 일컫는다. 우리의 인생도 큐비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후천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이 이루어져 하나의 '나'와 '일생'을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 어떤 인생을 완성해야 하는 것일까.
위대한 철학자 '니체'와 '들뢰즈'는 일생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운명애(Amorfati)'라는 말을 하며 우선, 자신의 타고난 모습 혹은 주어진 환경 자체(선천성)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긍정을 통해 인간은 '절대적 강자'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들뢰즈는 "가장 낮은 것을 어떤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심지어 점진적 감소의 상태에서도 어떤 긍정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폭포의 역량이나 전략의 역량이 필요하다."라며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이야기한다.
여기서 '가장 낮은 것'은 나의 단점 혹은 콤플렉스를 의미한다. 가장 낮은 것을 단점으로 바꿔 말하면 "단점을 어떤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폭포의 역량이나 전략의 역량이 필요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의문에 빠진다.
그렇다면 '폭포의 역량'은 뭘까? 하며 말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폭포의 역량이란 폭포의 성질을 이야기한다.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들뢰즈는 폭포의 가장 밑(낮은 것)을 단점이라고 생각했으며 위에서 떨어지는 것은 단점을 바라봐야 하는 우리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자신의 단점을 응시하고, 부딪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니체와 들뢰즈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단점을 인정하는 순간,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가 자신의 약발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양발잡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보디빌딩 선수가 자신의 약점 부위를 발견하는 순간, 그 부위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장애를 가진 이가 자신의 장애를 숨기지 않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건 장애(障碍) 즉, 그 사람의 결함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위의 두 사람은 '진정한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단점을 인정하고, 긍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가기 전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우리의 단점을 그저 나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인정하며 긍정하는 것이다.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며 어제의 오늘은 오늘이 아니다.
사진출처: - 런던 테이트모던 현대미술관, <우는 여인>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