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보내드리며
월요일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니 어쩌면 일요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번주 월요일의 시작은 전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7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50분에 버스를 타서 8시 30분에 회사에 도착해서 업무 준비를 한 뒤, 업무시간보다 조금 일찍 업무를 시작했다.
월요일은 한 주의 시작이었기에 아침부터 업무가 많았고, 나는 평소처럼 자동으로 켜진 Pc 카톡 속 메시지들의 알림을 모두 끈 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톡 하나가 나의 작업표시줄 밑을 비집고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오전 9시 34분.
아빠의 연락을 확인한 순간, 시끄럽던 나의 세상은 고요해졌고, 마음 한 구석에서 울리는 잔잔한 파동이 파도가 되어 나의 마음을 헤집었다. 고요한 세상 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고 비상구로 나가 지금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는 주무시던 중 돌아가셨다고 했다.
"얼른 집으로 와."
내가 바라본 현실은 허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팀장님께 부고 소식을 전하고,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팀 내에 쪽지로 유관자들을 지정한 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한 없이 따사로운 햇살이었다.
한 없이 아름다운 미소들이었다.
한 없이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 없이 우울해졌다.
기분을 밝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우울의 전유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이 되어 이사를 가기 전까지 옆집에 거주하셨다. 올림픽 기간에는 집에서 함께 올림픽을 봤었다. 그리고, 그게 할아버지와 함께 무언가를 해본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는 다리가 안 좋으셔서 걸음이 불편하셨기에 밖을 자주 나가시지 않으셨고, 나는 학업과 취직 후 업무 등을 핑계로 할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루 뒤, 할머니의 부탁으로 약을 챙겨가기 위해 다시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의 흔적들을 마주했다. 그때 흐른 눈물을 지금 생각해보면 죄책감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병세가 나빠진 것도 모르고, 찾아뵙지도 않았다는 나에 대한 죄책감... 거실 의자 위 미처 신지 못한 양말, 쇼파 위에 놓인 말기암 통합요법 상담 책과 약들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린 뒤 장례식장으로 향해 할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이자 다른 세상에서의 또 다른 시작의 길을 바라보고 집으로 와서 오래된 앨범들을 뒤적였다. 혹시나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러나 모두 나의 사진들뿐이었다.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 단 한 장도 앨범에 남아있지 않았고, 휴대폰 사진첩에도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고등학생 3학년 때 처음 만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애처가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고맙네, 고맙네"였다.
할아버지는 장래가 유망한 축구선수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축구하는 모습을 보곤 반하셨다고 했다.
할아버니는 20대 초반,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다치셔서 축구를 그만두셨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화를 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여름이 되면 할아버지는 항상 한쪽 다리를 꼬고 쇼파에 앉아서 손부채를 천천히 흔드셨다.
기억은 사라지고 추억은 왜곡된다고 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내가 바라봤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인자하셨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아요 할아버지...
영영 이별이 아닌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는 이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