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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Jun 19. 2021

큐플릭스 - 태양의 서커스 Part.1 아스테이아

(연재소설/판타지/웹소설)




  아스테이아. 그 아이의 이름이다. 내가 그녀를 구한다면 이 장막과 외줄 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스테이아는 형태가 없었다. 나는 거울처럼 이따금 아스테이아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면 그녀는, 나를 꿰뚫어버리곤 했다.


  나는 벙어리다.


  단장이 아스테이아를 아시아 어디쯤에서 데려온 것처럼, 단장은 나를 남미 어디쯤에서 데려왔다. 인신매매나 납치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단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사양길에 접어든 서커스단을 유지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술을 익혔다. 나와 함께했던 소년들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또 그 절반으로 줄어들 무렵 나는 간단한 마술부터 줄타기, 저글링까지 온갖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열세 살 즈음엔 적게나마 보수도 주어졌다.


  미트라는 줄 타는 여자다. 줄타기를 비롯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 여자. 합숙소는 그다지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상대를 바꿔가며 섹스를 즐겼다. 그저 만족스러웠다. 보수도 좋았고 유랑은 즐거웠으며 미트라와의 섹스도 좋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스테이아를 보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아스테이아는 단장과 같은 방을 썼다. 기술을 익히는 일은 없었다. 아스테이아는 종종 단장실 테라스로 나와 우리가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눈을 마주칠 때면 그 깊고 검은 눈 속에 고인 슬픔에 야트막한 탄식이 일었다. 그 탄식은 어떤 ‘말’같았다.


  최근엔 단검을 투척하는 기술을 익혔다. 단검은 10m까지 세 바퀴를 회전하며 날아가 꽂힌다. 무회전 투척도 가능하다. 나는 단장의 이마에 단검을 꽂아 넣는 상상을 했다. 물론 상상일 뿐이다. 이곳은 나와 아스테이아의 새로운 터전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단검을 투척해 단장을 죽일 수는 없다.


  대신 막사에 몇 가지 장치를 해두었다. 막사는 타기 쉬운 천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여섯 개의 기둥과 용마루 하나만 처리한다면, 막사를 무너뜨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이미 폭죽용 화약을 기둥과 용마루에 설치해두었으므로 내가 공연을 시작하는 20시쯤이면 모든 일이 끝나있을 터였다.


  우리의 배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닿았다. 


  소련이 무너진 뒤 단장이 헐값에 사들인 유조선을 개조한 것이었다. 붉고 푸른 페인트가 율동적으로 거대한 선체를 감싼 모양이다. 갑판에는 대형 천막극장 ‘그랑 샤피또’가 70동의 컨테이너에 나뉘어 실려 있다. 움직이는 마을이다. 


  테크노 음악과 함께 내가 공중을 날고 있었다. 서울행 고속버스에서 본, 우리 서커스단의 광고였다. 공중에서 네 바퀴를 돌아 반대편 그네를 잡는 고난도 동작이 끝나고 하얀 화면에 우리를 후원해준다는 카드사의 마크가 찍힌다. 버스 창가를 바라본다. 아스테이아의 고향일지도 모를 이 나라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여기서 아스테이아를 구해낼 생각이다.


  내가 18살이 되던 해 우리 서커스단은 상파울루에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무렵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아스테이아와 단장을 제외한 우리 서커스 단원들은 완벽한 허벅지와 복근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땅에서 발휘하던 힘을 공중에서는 발휘하지 못했다. 바닥이 없다는 건 그 움직임에 전혀 다른 감각을 요구했다. 나에게 공중그네는 지상보다 편하고 자유로웠다. 


  서커스 공연이 끝나고 단장은 나를 불러들였다. 단장은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그는 ‘정말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가족사진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어미의 품에 안겨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아이와 불안정한 눈빛의 남자가 있다. 여자는 거적 데기 같은 옷을 두른 채로 눈가에 시커먼 멍이 들어있다.


  “네 부모다. 13년 만인가…. 아직 여기 살고 있더구나. 간다고 하면 말리지 않겠다만, 사진과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약을 하고 네 어머니를 패고 있더군. 네 수고를 생각해서 돈을 좀 쥐여주긴 했다만, 며칠이나 갈지…. 네 부모는 너를 팔았지만, 나는 너에게 정당한 수당을 지급하고 온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너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우리 같은 일류가 단원을 노예처럼 부릴 수는 없지. 네가 선택하도록 해.” 


  알만한 사진이다. 아버지는 약쟁이였으며, 어머니는 멍청했고 우리 집은 가난했다. 부모는 단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서커스단에 나를 기꺼이 팔아넘겼으리라. 나는 사진을 뒤집어두고 단장실을 나섰다.





예고편 : 서커스 단원들을 착취하는 단장은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다음화 링크




https://open.kakao.com/o/s5iB5T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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