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초단편/판타지)
'차가운 우유 속을 걷는 기분이다.'
화이트 아웃을 경험한 탐험가들의 말이다. 극지의 강한 햇볕이 새하얀 눈발에 부딪혀 시야를 앗아가는 화이트 아웃은 눈 폭풍인 블리자드와 함께 극지 탐험가가 마주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으로 꼽힌다. 온통 새하얀 세상에서 자신만이 그림자조차 없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건 별거 아니네, 싶겠지만 화이트 아웃으로 동료를 잃은 이들이 느끼는 극심한 공포감과 혼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외로움, 나 혼자뿐이라는 인식은 우유 속에 던져진 인간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다.
그리고 난 우유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상하 좌우 온통 하얀 세상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8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엔 동료가 있었지만 블리자드에 휩쓸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이트 아웃, 우유 속에 던져진 꼴이 되었으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날카로운 추위가 쑥 하고 파고들었다. 영하 60도? 70도? 아무래도 좋다! 이대로 죽는 수밖에. 마지막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고 크게 뱉었다. 회백색 숨이 토사물처럼 쏟아졌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꽃이 핀 어느 들판에서다. 하지만 GPS로 본 좌표는 분명히 남극을 가리키고 있었고, 아내가 선물해준 G-SOCK은 2012년 1월 20일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블리자드에 휩쓸린 게 18일이니까 이틀만에 깨어난 것이다. 이상했다. 시계에는 온도가 영상 24도이지만 남극은 아무리 온도가 높은 계절에도 영하 24도를 넘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다. 게다가 이 처음 보는 하얀 꽃은 뭐란 말인가? 그리고 또 '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저기요! 여기가 어디죠?"
"남극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서양인이 그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최초의 극지탐험가 스콧이 거기 서있었기 때문이다. 아문센과 함께 최초의 남극탐험 두고 경쟁했다가 식량부족과 악천후로 동사한 비운의 극지 탐험가였다. 어째서 그가 여기 있을까 생각해본 결과, 역시나 내가 죽은 게 확실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는 천국이나 지옥 같은 곳이 아냐 그냥 '남극'이야 자네가 얼어 죽었다고 생각하나? 아니야 남극에서는 아무것도 죽지 않아, 썩지도 않아, 자네는 그냥 얼어있었을 뿐이야."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럼 이곳은요? 남극이라면서요? 이 꽃은 뭐고 이 날씨는 뭐죠?"
스콧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아문센은 자기가 남극의 모든 것을 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야. 자네 혹시 '남극의 봄'이라고 들어봤나?"
"있긴 한데... 그래봤자 영하 24도인걸요?"
"그게 아냐.. 내가 1912년 1월 20일..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줄 아나? 딱 지금 같았지, 따뜻하고 사방엔 이 하얀 꽃이 피어있고.. 난 그걸 따다가 귀로하는 길에.. 얼어버린 거지. 자네도 죽어버린, 아니 얼어버린 멍청이 치고는 운이 좋군. '남극의 봄'을 보게 되다니"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스콧의 말에 따르면 남극에는 100년에 단 하루 '봄'이 온다고 했다. 스콧과 나는 그것을 목격한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노스 페이스'를 보고 이누이트냐 묻기에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하니 모른다고 했다. '코리아'라고 말했으면 알았을까? 스콧에게 왜 신발이 없느냐 물으니 귀로하는 길에 삶아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잡다한 대화가 오갔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이제 다시 겨울이 오겠군.."
스콧이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스콧이 새파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다시 얼어버리는 거지."
"....."
나는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남극에서만 볼 수 있다는 새파란 달과 사금파리 같은 별들이 빛났다.
순간 사방에서 총천연색 장막이 펼쳐지는 듯 했다. 오전 내내 쌓인 지열이 급속도로 냉각하면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사방이 신기루로 가득 찼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란색, 초록색 온갖 색의 오로라가 일렁였다. 모든 것이 반사되고 산란하고 흔들렸다. 커다란 달만큼이나 커다래진 눈에 온갖 색이 쏟아져 내렸다. 새하얀 꽃들이 키스하듯이 서로의 줄기를 비틀어 안았다. 나와 스콧은 들판을 뛰어다녔다 들판에 지쳐 쓰러진 우리는 새파란 달을 올려다봤다.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어... 그런데 그게 좀 힘들 것 같아.."
"네?"
"잘 가게"
갑자기 몸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픽- 하고 시야가 나갔다. 기분 나쁘게 선명한 자신과 새하얀 공간으로 돌아온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따뜻한 우유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2012년 1월 20일, 영하 80도에서 동사한 대원을 회수한 한국극지탐험대는 대원을 영국의 냉동인간 연구기관의 도움을 받아 해동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보도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냉동인간 연구학회는 우선 유영민 씨가 튼튼한 몸을 가졌고, 영하 80도에서 급속도로 냉동된 것, 그리고 이틀 만에 신속하게 구조된 점이 유영민 씨의 '부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발표했다. 깨어난 유영민씨의 몸은 건강한 상태이며 '남극의 봄을 보았다' '스콧은 살아있다' 같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안정이 필요한 단계라는 말로 발표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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