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시선, 행복 X 로맨스판타지코믹액션스릴러공상과학
오늘은 우리가 만난지 3650일 18분 12초가 되는 날이다.
아니, 이제 13초가 되는 날이다.
처음부터 그녀가 나를 좋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상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종종 망설여지곤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제주도에서 조랑말을 렌트 해보자'라거나, 감귤 국수 따위를 만들어 먹어보자는 이야기에(유감스럽게도)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대신 08:57분에 서울에서 출발해 10:51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해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뭘 하고 어디에 묵을 지를 심사숙고하여 작성하곤 기안문 올리듯이 보여주었다. 그녀는 흡족한 얼굴로 기안문을 통과시킨다.
"훌륭하다"
이럴 때면 마치 사장님의 칭찬을 받은 신입 사원처럼 마음이 들뜬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순간은 제주도에 도착해 해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나조차도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는데 내 앞에서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11시 32분 정확해"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이 여자다 싶었다. 휴양지에서 조차도 시간을 먼저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일생에 바라왔던 이상형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녀와 함께 라면 세상에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3영업일 이내에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아 맞다 환전은 해왔어?"
"제주도에서? 무슨 환전?"
"제주도에서 화폐로 귤 쓰는 거 몰라?"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런 건 솔직히 받아주기가 힘들지만, 이미 시계를 보는 뒷 모습에서 사장님의 아재개그 정도는 너그러이 웃음으로 넘겨줄 수 있는 신입 사원 마인드가 되어버렸다. 새삼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12시 21분 이니까 이제 택시 잡고 예약한 식당으로 가야해"
"제주도에서 택시는 무슨 조랑말 타고 가"
'농담하지 마'라고 말하려는 순간 멀리서 반짝이는 형체가 다가왔다. 분명 말인데, 어쩐지 각이진 모양이다. 이마에는 TAXI라는 글자에 몸에는 신작 넷플릭스 영화광고가 프린팅 되어 있다. 기계인 모양이다. 내가 얼어있는 사이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 등 위에 올라탄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 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올라타자 그녀가 허리를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곤 생각했다.
그래, 이해할 수 없으면 뭐 어때.. 제 시간에 도착 하는 게 중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