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잘 쓴다.
여기서 잘 쓴다는 건 자주 쓴다는 것을 포함한 의미다. 장담하건대 나는 태어나서 입으로 한 말보다 키보드로 한 말이 많은 사람이다. 글쓰기의 3대 운동이라 할 수 있든 다독 다작 다상량에서 다작은 우선 먹고 들어간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를 이렇게 정리했다. E=mc2, 그렇다면 나는 글을 잘 씀=글의 질*글의 양2이라 말하고 싶다. 나는 그 비율에서 글의 양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작파다. 쓰는 종류도 많다. 하는 일이 에디터다보니 신문기사, 추천사, 카피등 TPO를 갖춰야 하는 글을 쓸 때도 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보니 언제 그지가 될지 모르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교적 최근까지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책을 세 권 썼다.
이 중에서도 공감 능력이 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공감은 '타인의 사고와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동질의 심리적 과정'을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은 글을 잘 쓴다. 특히 소설을 쓰거나 시를 쓸 때, 즉 문학적인 글을 쓸 때 빛을 발하는 경향이 있다.
소설가는 수많은 인물의 퍼스넬러티를 구현하기 위한 과정에서 공감 능력을 사용한다. 심지어 그 인물들 간에 심리적 역동까지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 한다. 공감 능력을 비롯한 고도의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오죽하면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을 두고 신의 놀이라고 하겠나, 시인은 한술 더 뜨는 경향이 있어서 아예 사람이 아닌 것에도 공감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의 뇌에는 거울뉴런이 있다. 이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는 기능을 한다. 고등 기능으로는 감정의 공감과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감정의 공감'과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인데, 이는 '정서적 공감 능력'과 '인지적 공감 능력'으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정서적 공감 능력이 강한 사람은 옆 사람이 울면 같이 운다. 말 그대로 이심전심이다. 인지적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마음과 의사를 금방 읽어낸다.
정서적 공감은 캐릭터의 생생함을 구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 유독 봉사, 자연보호 등에 관심이 많고 마음씨가 선한 사람들이 있는데, 위 공감 능력 중 정서적 공감 능력이 크게 발달하여 얻은 부수적인 결과가 아닐까 한다. 소설을 쓰다가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어 울컥울컥한다면 이건 정서적 공감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인지적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하는 능력이다. 추리력 같기도 하지만, 좀 더 깊다. 소설가는 살인범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살인을 해보지 않는다. 정서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인지적으로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세상은 넓어서 헤어진 후의 심리를 연구해 본다고 사귀던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고 '아 그거 소설 쓰려고 그랬던 거야.. ㅋㅋ ㅈㅅ'이라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있긴 하더라)
인지적 공감과 관련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면, 황석영 소설가는 소설가를 두고 ~이즘에 갇히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모든 이해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영역은 그 사람에게 영영 닫힌 영역으로 글쓰기를 비롯한 어떤 가능성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넘나들 수 있는 담력(?)혹은 비위, 자유로움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는 창작자중 한분은 일베와 메갈을 동시에 했었다.
이동건 웹툰 작가는 남자이지만, 유미의 세포들에서 유미의 퍼스낼러티를 생생하게 구현한다. 나는 MBTI를 소재로 INFP 미니픽션을 쓴 적이 있다. 거기 달린 댓글을 보면 이렇다.
나는 INFP와 많은 부분이 다른 INTJ 유형이다. 가장 큰 차이를 두고 보면 나는 남의 눈치를 그다지 많이 보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런 캐릭터를 구현해 냈다. 공감을 통한 미러링, 또는 미미크리(모방하는 놀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쉽냐하면, 당연히 어렵다. 쉽지가 않다. 여기에는 타고난 성향 +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사실 훈련과 주변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무딘 사람도 고장 난 시계도 하루 2번은 맞는다고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깊은 공감을 통한 배려나 감동, 이심전심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도 그 빈도와 강도를 늘리는 식의 차이지 관심법을 개방한 궁예처럼 모든 마음을 공감하고 꿰뚫어볼 수는 없다.
또한 먹고살기 바쁘고 여유가 없다 보면 점점 떨어지는 능력치중에 하나다. 소설은 나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예술 장르이긴 하지만, 마치 운동을 오래 쉬면 근육이 굳는 댄서와 같이 먹고사는 일에 치이고 오랜 절필을 하다 보면 이 능력을 잃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신호에 무뎌지는 경향도 무시할 수 없다. 또래집단 안에서의 유대와 공감이 예전처럼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관계에서 오는 자극도 이전보다 크지 않다. 거기에 추가로 삶이 쳇바퀴처럼 돌면서 새로움, 가능성에 에너지를 쏟는 일이 줄어든다. 이건 창작자로서 경계해야 하는 부분 같다.
훈련 방법이라면 가장 전통적으로 '독서'가 있다. 책은 한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가장 내밀한 형태로 드러내 보이는 매체 중 하나다.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보는 것도 좋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호기심과 관심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극장에서 비극을 상영했는데, 이 비극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의 비극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삶을 간접 체험하게 하여 집단의 공감 능력과 성숙도를 높이는 일종의 의식이었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1인분의 삶을 살아간다. 내 일이 아닌 것, 당사자성을 느낄 수 없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신경 쓰기 귀찮고 심지어 배타적이다. 특히 요즘 회자되는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했어?)'이라는 말은 이제는 내가 아닌 것에는 1도 관심을 두기 싫다는 선언처럼 읽혀서 마음이 언짢다. 모쪼로 공감 능력 높은 사람이 글도 잘 쓴다. 다 쓰고 보니 관련한 짤이 하나 생각나서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