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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Oct 03. 2022

왜 못된 사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까

  살다보면 온갖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개중에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못돼 처먹어서 좀처럼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사람과 혹여 연인으로 만나거나 사제관계로 만나거나 가까운 일로 엮이게 되면 여러모로 심적인 피로가 쌓인다. 



  관계의 비대칭성이 클수록 자신이 받는 영향은 커진다. 컨트롤 이슈가 강한 부모나 연인, 가학적인 교육관을 가진 스승, 마이크로 매니징 하는 상사 등등..



  사람들은 분재를 두고 아름답다 하지만, 분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사로 나무가 자라날 방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 경우는 사람으로 치면 심적인 피로가 쌓이는 수준이 아니라 나의 형태가 뭉개지는 것이다. 그렇게 비틀린 방향대로, 미운 사람의 기준을 나의 기준으로 내면화하거나, 닮아가거나, 의식하게 된다. 


  사람의 심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맛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스스로 눈치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직장동료가 말해준 것처럼 무엇을 하든 자기인지가 중요한데, 어디까지가 나의 자연스러운 형태이고 어디까지가 왜곡된 부분인지 살피기가 힘들다. 


  강렬한 기억에는 선악이 없다. 유명세에 선악이 없듯이 말이다. 이순신 장군이나 백범 김구 선생님이 유명한 것처럼 신창원이나 유영철도 유명하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는 건 선한 쪽일 수도 있고, 악한 쪽이 될 수도 있다. 간혹 후자를 반면성생 삼아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특수한 경우고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야 좋은 사람이 된다. 반면 선생은 순행이 아닌 역행에 가깝다. 에너지가 많이 들고 자연스럽지 않다. 


  나는 지금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몇몇 강렬한 기억들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리고 기억에 대해서도 애착을 느낀다. 이게 참 묘한 부분이고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닌 것에서조차 의식을 거둘 수 없다면, 이게 내가 분재처럼 비틀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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