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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Nov 18. 2022

무키무키만만수와 에펠탑 이후의 세계, 남산타워


  무키무 만만수의 '남산 타워'를 듣고 있으면 에펠탑이 세워질 당시 모파상이 느꼈던 혐오감이 무엇일까 조금은 알 것 같다. 


  무키무키만만수는 서울 어디서나 우리를 내려다보는 남산타워가 불쾌했고, 모파상은 파리 어딜 가든 보이는 흉물스러운 에펠탑이 불쾌했다. 그는 심지어 매일 점심을 에펠탑 안에서 먹었는데, 그 안이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성 : 시간적 간격을 초월하여 종교적 실존이나 순환하는 문화 현상이 영원한 곳에서 되풀이되거나 대면하는 일


  두 탑은 각각 공간에 동시성을 부여한다. 파리 시민들은 파리 어디에서든 에펠탑을 공유했고, 서울 시민들은 서울 어디에서든 남산타워를 공유한다. 무키무키만만수는 이 남산타워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산타워를 가리켜 '너는 망한다'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에펠탑은 파리를 넘어 전 세계에 동시성을 부여했다. 1912년 4월 16일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던 날, 에펠탑은 타이타닉이 침몰했다는 사실을 타전 받는다. 타이타닉의 침몰이 지구 반대편인 프랑스에 닿아 다음날 신문에 실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세계인이 동시적으로 타이타닉을 공유했다.


  2022년 우리는 그 어떤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동시적인 삶을 살고 있다. 동시성을 공유하는 대표적인 공간은 편의점, 스타벅스, 맥도날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들은 항상 우리들 곁에 있고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탈리아 스타벅스에 가든, 강북구 스타벅스에 가든 우리는 스타벅스를 공유하고 있으며,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 사람이 인스타그램에 일상은 타이타닉호의 침몰 소식이 에펠탑에 닿은 것보다 훨씬 빠르게 내 스마트폰으로 전송되고 있다. 편리, 이기 차원을 넘어서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무키무키만만수가 '남산타워'에서 노래한 것처럼 남산타워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면 남산타워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나아가 조종하고 있다는 발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같은 크기라도 옆에 더 큰 것이 있으면 작아 보인다. 점점 더 큰 단위로 엮이는 세계에서 '개인'이 가지는 의미와 '개인으로 살아가는 감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하루에 생산되고 접하는 정보의 양은 뇌에 부하를 줄 정도로 어마어마하며 심지어 잡다하다. 


  모파상 같은 소설가나 무키무키 만만수 같은 예술가가 보기에 이런 현상은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은 점점 더 거대한 단위의 동시성으로 엮여가는데, 이 사이에서 '나'는 표백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무키무키 만만수는 서울이라는 공간에 동시성을 부여하고 있는 남산타워를 '너'로 지칭하며 저주를 퍼붓는다. 이는 '동시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곧 망할 것'이라는 예언에 가까운 구절이다. 수준 높은 프랜차이즈와 질 좋은 공산품이 넘쳐나고 웬만한 동네에는 전부 편의점이 깔려있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상한 소외감을 느낀다. 


  티베트의 승려 달라이라마는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물건은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세상이 불행한 것이 물건이 사랑받고 사람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세상이 어떤 물질적인 토대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 부분이 반드시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무키무키 만만수의 다른 노래인 '파리 택시운전사'는 러프하지만 한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나는 빠리의 태액시 운전사아 (붐 빠 붐 빠)

나! 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앜 (붐 빠 붐 빠)

쁘랑스의 택시 운전사는 아니다 (아니다!)

유럽의 택시 운전사는 아니다 (아니다!)

지구의 택시 운전사는 아니다 (아니다으!)

우주의 택시 운전사는 아니다 (아니다아아!)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는 자기주장이 강한 노래다. 비명을 지르듯이 시작하는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1.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이지만, 프랑스의 택시운전사는 아니며, 유럽의 택시운전사도, 지구의 택시 운전사도, 심지어 우주의 택시운전사도 아니다. 나는 다만 '파리의 택시 운전사'일뿐이다. 


  '나'는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더 큰 단위의 세계와 엮이길 거부한다. 파리와 택시운전사 이외의 그 어떤 동시성도 거부하는 사람이다. 물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거나, 개방성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현대사회에서 '나'를 규정함에 있어서는 이 정도 확고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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