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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Dec 31. 2022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정신분석심리학자이자 사회학자다. 개개인 각각의 욕망, 이기심, 상승 욕구를 긍정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사랑'을 키워드로 다소 이상적이고, 정이 넘치는, 아가페적인 연대를 꿈꾸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가장 유사한 정신분석학자는 아들러였는데, 그도 인간의 사회적인 부분이 개인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프로이트와 척을 지기도 했다.  


  그는 집, 교통, 극장, 식품에 있어서 지금의 기본소득과 같은 이야기를 주장한다. 선구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공산-사회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보인다. 단순히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가지는 경제적 차원의 문 제라기 보다, 저런 사회가 도달해야만 서로 '사랑'을 통해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한 주장이 아닐까 싶다. 주장하는 이유가 다르다.


바이오필리아와 네크로필리아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어쩌다 삶을 권태롭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증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한다. 그 원인을 지나치게 이성을  추구하는 모더니티에서 나왔다고 보는 듯하다. 과학기술/계획/기계와 같이 차갑고 죽은 것에 끌리는 '네크로필리아'가 득세하게 되면서 '바이오필리아'적인 삶은 매력을 잃었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에 끌린다. 러프하게 말해서 네크로필리아는 '사고형'에 가깝고, 바이오필리아는 '감정형'에 가까운 것 같다. 그는 책에서 '다른 생명체가 '잘 되길 바라는'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내 사랑은 죽음의 키스인 것이다'라는 말로 둘이 가지는 가치관의 차이를 설명한다.


  즉 네크로필리아적인 가치로 점철되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고 다른 쪽에서 희망과 가능성을 찾는, 포스트모던한 사고방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우리는 사회를 무생물처럼 대하지만 그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생명인 각각의 개인이다. 사회는 이성을 통해 짜인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그 안에서 생명의 가치가 소외된다면 참 아이러니한 것이지만, 네크로필리아적인 사회에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오필리아적 삶이 어려운 이유 중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돌봄 노동'이 소외된 것을 이야기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주고받는 감정과 돌봄은 지나치게 저평가 되어 있다.


삶에서의 허무와 증오


  독서모임을  함께한 해냄님은 이 책이 '죽음'에 대해 자살을 생각할 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무의미하고 권태롭고 쉽게 사라질 수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거기서 철학적 좀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머리로는 박식하고, 올바르며, 전지적인 사람들이 삶에서 무감각하고 권태롭고 우울감을 넘어 무감정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했다. 거기에는 날카로움과 번뜩이는 지성이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삶과 타인, 생명에 대한 다정함과 애착이 없다는 생각에 미쳤다. 


  보통 이런 허무를 느꼈을 때 나는 두 가지 선택을 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고민을 주는 관계를 곧장 끊어버리거나, 자기개발 등으로 회피하여 에너지를 쏟는 것 정도였는데, 이게 하면 할수록 삶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에서는 꾸준히 저런 노력이 삶을 충만하게 하는데 큰 의미가 없으며, 결국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만 해결될 문제라고 말한다.


  네크로필리아는 삶을 쥐어잡으려 한다. 하지만 쉽게 손에 쥐어지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면 그것을 파괴하고자 한다. 삶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대체적으로 네크로필리아적인 삶을 살았다. 최근에 가장 기뻤던 일을 생각해 보니 전시를 열면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와 의견을 주고받았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면서 '노력의 방향'에 대해 많은 인사이트를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와의 이야기


  '내 심장과 감정도 내 생각 못지않게 합리적일 수 있다. 내 생각 역시 심장만큼 비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심장과 생각을 따로 떼어 별개인 양 이야기할 수 없다. - 에리히 프롬


  나는 최근 진로에 대해서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도 통제에 대한 욕구가 강하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주로 소리 높여 이야기하곤 했다. 이번에도 비슷한 대화일까 생각했지만, 끈기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니 몇 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렸었는데 커다란 나무를 하나 그리고, 작은 나무를 하나 그렸다. 서울에는 이런 큰 나무가 많아서 나 같은 작은 나무는 뿌리를 뻗기도 어렵고 잎을 펼치기도 힘들다는 이야길 하셨다. 그러니 지방으로 내려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길 하셨다. 나는 이쪽 분야에서는 말만 많고  성과 없는 친구들 천지인데, 나는 그래도 책도 3권을 냈고 강연에 전시까지 예정되어 있으니 이제 막 결과가 보이기 시작하는 경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렇다면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해서 일을 해볼 것을 권했다. 가지를 쳐서 나를 살게 하라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나는 그 과정을 되짚어 보면서, 아버지는 네크로필리아적인 가치로 나에게 본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요했지만, 지금은 바이오필리아라고 해도 좋을만한, 대상을 살게 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쳤다고 말했다.


종합


  여유와 휴머니즘에 대해 생각한다. 척박한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람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오늘은 희수라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그 영화에서는 염색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던 약속은 공장이 바빠지면서 파토가 나고 희수 혼자 기차를 탄 채로 여행을 떠난다. 그 쓸쓸함이 너무 슬펐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공산주의적 세계관은 저런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의지로 보인다. 당장 파이 다툼으로 경쟁하기 바쁜데 서로를 사랑하라니 그게 가능이나 할까 싶은 것이다. 그게 참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놓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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