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018 년작 '사랑의 모양'을 봤습니다. 감독의 다른 작품인 '판의 미로'에서 큰 영감을 받았던 저로서는 기대되는 작품이었어요.
영화는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인간과 닮은 점이 거의 없는 '어인'이 등장해요. 미국의 스테레오타입 백인 남성을 상징하는 '리처드 스트릭랜드'는 지배적인 위치에서 실험체인 '어인'을 고문하고 죽이려 하고, 벙어리 청소부 '엘리자'를 무시합니다.
리처드는 멋진 차, 멋진 집,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까지 마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나 공허해 보였어요. 한편 서로의 상처를 만지고 사랑을 나누는 엘리자와 어인의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리처드의 권력과 지배력에 대한 집착, 파괴적 행동이 과시적, 연극적 성격을 지닌다면, 엘리자와 어인, 그 친구들은 생명과 사랑, 포용을 보여주고 있어요.
감독은 냉전 이데올로기, 전쟁 등 큰 사회적 갈등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전자가 말하는 거대한 가치들이 얼마나 웃기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물질적인 것을 지나치게 사랑하다가 불행해진다고 말해요. 마치 스트릭랜드가 '캐딜락'과 같은 물질의 구매에 집중하지만, 손가락은 괴사 하는 것처럼 말이죠. 한편 엘리자와 친구들은 사랑과 우정 속에서 계산 없이 진실한 행동으로 행복을 꾸려갑니다. 네크로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님이 뭔가를 '알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민감성이라고 할까요?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점과 단점을 끌어안는 것을 넘어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까지 '가닿아야'한다는 생각이 그렇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의 흉터가 치유되지 않고 다른 형태가 되는 부분이 그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어요.
스토리 외적으로도 1960년대 미국의 모습을 매력적으로 그려낸 부분, 특정 장면에서 독특한 연출들이 기억에 남네요. 진정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 핵심을 잘 짚어낸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