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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관계의 7가지 파이팅 스타일

지배형·실리형·냉담형·고립형·복종형·순박형·사교형

by 허블

지난 장에서 우리는 갈등을 다루는 큰 스탠스(회피형, 경쟁형 등)를 봤다. 이번에는 조금 더 디테일한 성향, 즉 ‘선수 개인의 고유한 스타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지배형, 실리형, 냉담형, 고립형, 복종형, 순박형, 사교형. 심리 검사지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딱딱한 단어들이다. 보통 이런 말을 들으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쁜 놈’과 ‘호구’를 구분하게 된다.


“지배형? 꼰대 상사네.”

“실리형? 얌체 같은 놈.”

“복종형? 답답한 호구.”


하지만 이런 단순한 라벨링은 위험하다. 이 성향들은 단순히 성격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최적화된 파이팅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장에서는 이 7가지 유형을 링 위의 파이터로 다시 번역해 보려 한다. 당신은, 그리고 당신 곁의 그 사람은 어떤 스타일로 싸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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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배형 (Dominant)|“링의 주인은 나다” – 중앙 점령형


지배형은 링에 오르자마자 케이지 중앙부터 차지한다. 상대가 누구든 “주도권은 내가 쥔다”가 기본값이다. 회의를 하든, 친구들과 여행을 가든 자연스럽게 리더 자리에 앉는다. “일단 의견 들어볼게”라고 말은 하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판이 다 짜여 있다.


생존 이유: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는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약점: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것을 ‘협력’이 아니라 ‘패배’로 느낀다. “내가 주도하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불안이 강하다.


진화 팁: 링 중앙에서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나 보자. “이번 판은 네가 한 번 이끌어봐”라고 넘겨주는 것이, 진짜 강자의 여유다.


2. 실리형 (Calculated)|“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 – 카운터 파이터


실리형의 전투 철학은 ‘가성비’다. “이 싸움에서 내가 얻는 게 뭐냐?” 시간, 에너지, 돈, 감정.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 승진이 걸린 일에는 불같이 달려들지만, 티 안 나는 잡무에는 기가 막히게 빠진다.


생존 이유: 과거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가 처참하게 이용당한 경험이 있을 수 있다. “더 이상 호구 잡히지 않겠다”는 다짐이 만든 스타일이다.


약점: 모든 관계가 ‘거래’로 느껴진다. 순수한 호의조차 “저 사람이 뭘 원해서 저러지?”라고 의심하게 되어, 깊은 관계를 맺기 힘들다.


진화 팁: 아주 작은 ‘비효율 구역’을 만들어 보자. 딱 한 사람에게만은, 계산기 두드리지 말고 그냥 밥 한 번 사보는 것.


3. 냉담형 (Cold)|“감정은 사치다” – 거리 유지형 아웃복서


냉담형은 감정을 링 위로 가져오지 않는다. 오직 이성(Reason)으로만 싸운다. 누가 울면서 힘들다고 하면 휴지를 주는 게 아니라 분석을 시작한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이 뭔데? 해결책부터 찾자.”


생존 이유: 감정에 휘둘리면 다 죽는다는 위기감 속에서 자랐을 수 있다. 누군가는 끝까지 정신 줄을 잡고 있어야 했기에, 감정을 잠시 끄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약점: 침착함이 상대에겐 ‘무관심’이나 ‘비정함’으로 읽힌다. “넌 로봇 같아”라는 말을 듣고 억울해한다.


진화 팁: 순서만 바꾸자. [분석 → 공감]이 아니라, [공감(30초) → 분석]으로. “많이 힘들었겠네” 한마디면 당신의 분석은 완벽한 조언이 된다.


4. 고립형 (Isolated)|“혼자가 제일 안전해” – 코너 붙박이


고립형은 링 중앙으로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코너에 갇히기를 선택한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선 투명 인간이 되고 싶다. 말실수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이어폰을 끼고 자기만의 세계로 도망친다.

생존 이유: “함께해서 즐거웠던” 기억보다 “함께해서 다쳤던” 기억이 더 많다. 많이 다친 짐승이 동굴로 숨듯, 회복을 위해 코너를 택한 것이다.


약점: 고립이 길어지면 ‘선택’이 아니라 ‘유기’가 된다. “어차피 난 안 맞아”라며 세상과의 연결을 스스로 끊어버린다.


진화 팁: 코너에서 딱 반 발자국만 나와 보자. 하루에 한 명에게, 아주 사소한 인사라도 먼저 건네는 것.


5. 복종형 (Submissive)|“제발 때리지 마세요” – 무한 가드


복종형은 갈등 냄새만 맡아도 조건반사적으로 움츠러든다. “네, 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납작 엎드려 이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생존 이유: 어릴 때부터 “말대꾸하면 더 맞는다”는 공포를 학습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에게 복종은 비굴함이 아니라 처절한 생존 전략이다.


약점: 가드를 너무 오래 올리고 있어서, 내가 뭘 원하는지 나조차 잊어버린다. 결국 만만한 샌드백 취급을 받기 쉽다.


진화 팁: 거창한 반란 말고, ‘소심한 거절’부터 연습하자. “저는 짜장면 말고 짬뽕 먹을래요” 같은 아주 작은 주장부터.


6. 순박형 (Naive)|“세상은 아름다워” – 노 가드 전법


순박형은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 “설마 나쁜 의도로 그랬겠어?”,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 거야.” 타인의 장점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다. 주변에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생존 이유: 그래도 세상을 믿어보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가드를 내리지 않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약점: ‘선(Line)’을 너무 늦게 느낀다. 참고 참다가 이미 난도질당한 뒤에야 “아,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무너진다.


진화 팁: 남을 나쁘게 보라는 게 아니다. “나도 싫어할 권리가 있다”는 걸 기억하자. 나의 링에도 출입 금지 구역(레드 라인)을 그어둘 것.


7. 사교형 (Social)|“나 좀 봐주세요” – 쇼맨십 파이터


사교형은 링 전체를 휘젓고 다닌다. 어색한 침묵을 못 견디고 먼저 말을 걸고, 분위기를 띄우려 애쓴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에너지를 얻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안심한다.


생존 이유: 관계 속에서만 자기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사랑받지 못하면 버려진다”는 유기 불안이 이들을 화려한 쇼맨으로 만들었다.


약점: 관중이 사라지면 급격히 시든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좋아요)을 갈구한다.


진화 팁: 관중 없는 텅 빈 링 위에서도 혼자 섀도복싱을 즐기는 법을 배우자. 혼자 밥 먹고,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당신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이 일곱 가지 스타일을 다시 보니 어떤가? 단순히 성격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대로 치열하게 버텨온 베테랑 파이터들처럼 보이지 않는가?


지배형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강해진 사람이고,

실리형은 더 이상 뺏기지 않기 위해 계산을 배운 사람이고,

냉담형은 슬픔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차가워진 사람이고,

고립형은 상처가 너무 아파서 잠시 숨은 사람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미워 보였던 그 사람(혹은 나 자신)이 조금은 짠하게 보인다.


이 장의 목표는 당신의 스타일을 억지로 뜯어고치자는 게 아니다. 타고난 파이팅 스타일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변주’다.


“아, 내가 이 사람 앞에서는 자꾸 복종형으로 구네. 이번엔 눈 딱 감고 싫다고 해볼까?”

“내가 또 지배하려고 드네. 이번엔 입 다물고 듣기만 해볼까?”


이 작은 시도들이 쌓여, 당신의 경기는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맨날 똑같이 맞고 쓰러지는 지루한 패턴에서 벗어나, “어? 이번엔 좀 다르게 막아냈네?” 하는 짜릿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다음 장, 아니 이제 마지막 링 위로 올라갈 시간이다. 이 책의 시작이자 끝인 한 문장.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우리가 세운 멋진 인생 계획들이 현실의 로우킥을 만나 어떻게 찌그러지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다시 가드를 올리고 일어서야 하는지.


에필로그에서 땀 식은 평온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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