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트브레이크 펀치
격투기에서 취권(醉拳)은 낭만적인 기술처럼 보인다. 영화 속 주인공은 술 한 잔 들이켜고 비틀거리며 상대를 멋지게 제압한다. 흐트러진 척하지만 그 안에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다.
하지만 현실의 링, 특히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이름의 좁은 케이지 안에서 벌어지는 취권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그건 무술이 아니라, 그저 통제 불가능한 폭력일 뿐이다.
이 ‘현실판 취권’을 쓰는 사람들은 아주 독특한 패턴을 보인다. 술만 들어가면 눈빛이 변하고, 목소리가 커지고, 물건을 던지거나 심지어 주먹을 휘두른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꽂힌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으로 말한다.
“기억이 안 나.”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술이 웬수지.”
“다신 안 그럴게. 술만 안 마시면 나 멀쩡하잖아.”
이것이 바로 그들이 쓰는 최강의 방어 기술,“술 탓하기"다.
이들의 논리는 기적적이다. 폭언을 퍼붓고 상처를 준 주체는 ‘내’가 아니라 ‘술’이다. 그러니까 술이 깨면 나는 다시 ‘좋은 사람’으로 돌아온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할 때도 주어(Subject)가 묘하게 빠져 있다. “내가 때려서 미안해”가 아니라, “어제 술 때문에 실수가 있었네”다.
문제는 이 말도 안 되는 논리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는 생각보다 잘 먹힌다는 점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기술이 바로 ‘하트브레이크 펀치(Heartbreak Shot)’다.
만화 <더 파이팅>에 나오는 다테 에이지의 필살기, 하트브레이크 펀치. 상대의 심장을 직접 가격하여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게 만드는 치명적인 기술이다.
관계에서의 하트브레이크 펀치는 ‘사랑과 연민’을 이용해 상대의 심장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가해자가 술이 깬 뒤 무릎 꿇고 빌 때, 눈물을 흘리며 “너밖에 없다”고 매달릴 때, 피해자의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는다. 분명히 어젯밤 그 사람은 악마였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너무나 나약하고 불쌍해 보인다.
“그래, 이 사람이 원래 나쁜 건 아니야.”
“평소에는 얼마나 다정하고 성실한데.”
“술만 끊으면 정말 완벽한 사람인데.”
피해자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이 최면이야말로 상대가 노린 하트브레이크 펀치의 효과다. 심장이 마비되어, 도망쳐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만드는 것.
우리는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술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 안에 있던 것을 꺼내 보여줄 뿐이다.
알코올은 뇌의 전두엽, 즉 이성과 통제력을 담당하는 브레이크를 느슨하게 만든다. 브레이크가 풀렸을 때 튀어 나오는 폭력성, 비난, 공격성. 그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게 아니라, 원래 그 사람의 트렁크 안에 실려 있던 짐들이다.
평소에는 사회적 가면과 인내심으로 꾹꾹 눌러 담아놨던 본심이, 술이라는 열쇠를 만나 문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술만 마시면 딴사람이 된다”는 말은 틀렸다. “술을 마시면 비로소 진짜 그 사람이 나온다”가 맞다.
하지만 많은 피해자들, 특히 가족이나 연인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사실은 “잠재적 폭력배”라는 걸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관계의 파탄을 의미하고, 나의 선택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오히려 가해자의 변명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맞아, 어제는 네가 너무 피곤해서 그랬을 거야.”
“회식 자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거지?”
이것은 ‘공감’이 아니다. ‘공범’이 되는 길이다. 당신이 그 핑계를 받아주는 순간, 그는 다음번 취권을 쓸 명분을 얻는다.
“어차피 나중에 빌면 용서해 주니까.”
하트브레이크 펀치가 무서운 진짜 이유는, 반복될수록 심장에 굳은살이 박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충격적이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지만 두 번, 세 번, 열 번 반복되면 학습된다. 폭력의 시간(밤)과 사죄의 시간(아침)이 하나의 세트 메뉴처럼 굳어진다.
나중에는 폭력이 발생해도 화를 내기보다 체념한다.
“또 시작이네. 내일 아침이면 빌겠지.”
“그냥 내가 빨리 피해서 자는 게 상책이다.”
이 단계에 오면 피해자의 영혼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내가 좀 더 잘하면 이 사람이 술을 끊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이건 관계가 유지되는 게 아니다. 단지 심장이 멈춘 채로 링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여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아주 단호한 카운터 펀치가 필요하다. 그 카운터의 이름은 “분리(Separation)”다.
“술 마신 너”와 “맨정신의 너”를 분리해서 봐주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너”를 “하나의 인격체”로 통합해서 보는 것.
“술 마셨을 때의 행동도 너야.”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야.”
“나는 맨정신의 너를 사랑하지만, 취한 너와는 단 1분도 같이 살 수 없어.”
이 선언이 있어야 한다. “술만 안 마시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 사람은 지금 “술을 마시면 괴물이 되는 사람”이다. 그게 팩트다.
이 장을 읽는 당신이 혹시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면, 제발 부탁한다. “실수였다”는 말을 멈춰라. 당신이 휘두른 건 단지 실수가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을 짓밟는 폭력이다. 그 비틀거리는 주먹 끝에, 당신을 믿었던 사람의 심장이 박살 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피해자의 위치에 있다면, 부디 기억해 달라. 하트브레이크 펀치를 맞고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사람은, 눈물 흘리며 비는 그 사람이 아니다. 바로 링 밖으로 걸어 나올 용기를 가진 당신 자신뿐이다.
“술 때문이야”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가드(Guard)다. 이제 그 가드를 뚫고, 진짜 얼굴을 마주 볼 시간이다.
다음 장에서는 우리가 그토록 방어하고 싶어 했던 무의식의 진짜 모습들을 다뤄보려 한다. 억압, 부정, 투사, 합리화… 우리가 ‘성격’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8가지 방어기제를, 링 위에서 나를 지키는 8가지 가드 기술로 바꿔서 설명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