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아들러
로우킥이 허벅지 근육을 파괴하는 기술이라면, 카프킥(Calf Kick)은 정강이 옆 종아리 신경을 정밀하게 후려치는 악랄한 기술이다.
하체를 노린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 맞아본 선수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이게… 로우킥보다 훨씬 더 짜증 나고 무서워요.”
종아리는 우리가 걷거나 뛸 때, 마지막 힘을 실어주는 ‘디딤발’의 핵심 부위다. 중요한 동시에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이곳을 집요하게 차이면 단순히 “아프다”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발을 땅에 디딜 수 없게 된다.
가장 무서운 점은 ‘스텔스 기능’이다. 경기 초반, 카프킥이 몇 번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관객도, 심지어 선수 본인도 그 심각성을 잘 모른다.
“아, 종아리가 좀 쓸렸네.”
“살짝 찌릿한데?”
그러다 어느 임계점을 넘는 순간, 선수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주저앉는다. 발바닥을 바닥에 대는 것조차 비명을 지를 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아, 이미 오래전부터 내 디딤발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구나.
열등감(Inferiority)은 마음의 카프킥과 같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신경 쓰이는 찌릿함” 정도로 시작한다.
친구가 무심코 연봉 앞자리를 말할 때, SNS에서 동창의 화려한 결혼식 사진을 볼 때, 명절에 “사촌 누구는 대기업 갔다더라”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순간의 감정은 “나는 왜 저기까지 못 갔지?” 하는 아주 조용한 쑤심이다.
종아리에 닿은 가벼운 킥처럼, 겉으로 보기엔 멍도 안 들고 피도 안 난다. 그래서 “별일 아니야, 질투하지 말자” 하고 툭툭 털어낸다.
그런데 이런 장면들이 반복해서 쌓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발을 내디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 같은 게 뭘 한다고.”
“이제 와서 시작해 봤자 쟤들 발끝도 못 따라가.”
“어차피 저 사람들이랑 나는 사는 세계가 달라.”
앞으로 힘차게 한 발 내딛으려다가, 통증 때문에 화들짝 놀라 다시 발을 거둬들이는 무기력한 순간들. 바로 거기에, 열등감이라는 카프킥이 이미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심리학의 거장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열등감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 열등감이 있다고 봤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건강한 욕망. “지금 이 상태로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결핍의 감각에서 비로소 인류의 성장과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한다.
문제는 그 열등감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어떤 사람은 열등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연료로 삼는다.
“나는 이 부분이 약하니까, 더 연습하거나 도움을 구해야겠다.”
이들은 카프킥을 맞았을 때,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스탠스를 바꾸거나 방어 기술을 익힌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열등감이 너무 아프고 수치스러워서, 그 위에 두꺼운 갑옷을 덮어씌운다. 과장된 자신감, 타인을 깎아내리는 오만함, 학벌이나 재산 같은 외적 조건에 과하게 집착하는 태도, 혹은 “완벽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며 아예 시작조차 안 하는 회피.
아들러는 이런 상태를 ‘열등감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라고 불렀다. 마음 한가운데에는 “나는 턱없이 부족해”라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위에 “나는 누구보다 잘났어” 혹은 “나는 특별해서 남들과 달라”라는 화려한 가면을 덮어쓴다.
그 가면은 남들 보기에 그럴싸할지 모른다. 하지만 종아리 신경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정작 인생의 중요한 승부처에서 움직여야 할 때, 발이 말을 듣지 않고 무너져 내린다.
카프킥이 유독 까다로운 이유는,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선수의 기동력을 완전히 앗아간다는 점이다.
열등감도 그렇다. 삶 전체를 단번에 박살 내는 리버샷(트라우마)처럼 “그날 이후 내 인생이 바뀌었다”는 식의 비극적 서사가 아니다. 대신 “언제부턴가… 나 자신이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진다”는 은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학창 시절 별생각 없이 들었던 성적 비교, 외모 품평, 집안 형편에 대한 수군거림. 그때는 “기분 더럽네” 하고 넘겼던 말들이 무의식 어딘가에 작은 멍울처럼 남는다.
사회에 나와서도 카프킥은 이어진다.
“그 학교 나와서 이 정도면 성공한 거지.”
“네 스펙에 이 연봉이면 감지덕지야.”
“남자라면 / 여자라면 이 정도는 갖춰야지.”
그 말들이 매번 나를 KO 시키지는 않는다. 그냥 종아리를 툭, 툭 건드리고 지나가는 정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멍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마음의 뼈대가 와스스 부서진다.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할 때, 매력적인 이성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꿈을 입 밖으로 꺼내려 할 때.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감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내가?” 이 짧은 내면의 목소리 한 줄이, 당신의 디딤발을 가차 없이 꺾어버린다.
아들러가 보기에, 열등감이 ‘0’인 사람은 없다. 중요한 건 열등감을 없애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어떤 종류의 열등감이 있는지 정확히 이름 붙여 볼 용기”다.
우리는 종종 뭉뚱그려 말한다.
“나는 자존감이 낮아.”
“나는 원래 멘탈이 약해.”
하지만 조금 더 줌인(Zoom-in) 해서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문장이 나온다.
“나는 돈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유난히 작아지는구나.”
“나는 지능이나 학벌 무시를 당할까 봐 과하게 방어적이구나.”
“나는 외모 이야기가 나오면 투명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
격투기에서 상대가 내 왼쪽 다리를 노리는지 오른쪽을 노리는지 파악해야 방어할 수 있듯, 심리에서도 내가 어떤 영역에서 더 자주, 더 아프게 카프킥을 맞는지를 아는 게 먼저다.
이건 자학하며 “나의 약점 리스트”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카프킥을, 보호 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버텨왔는지”를 기록하고 위로하는 작업에 가깝다.
현대 사회는 역사상 카프킥이 가장 난무하는 링이다. 스마트폰만 켜면 타인의 인생 하이라이트가 4K 고화질로, 화려한 필터까지 입혀져서 눈앞에 쏟아진다.
남의 집 오션뷰 거실, 남의 억대 연봉 인증, 남의 명품 언박싱, 남의 완벽한 몸매. 그 속에서 나의 종아리는 24시간 난타당한다.
“나는 저들만큼 가지 못했다. 고로 나는 실패작이다.” 이 위험한 공식이 실시간으로 주입된다.
우리가 예전보다 열등감을 더 자주, 더 세밀하게 느끼는 건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다. 환경 자체가 카프킥을 피할 수 없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카프킥에 당해 다리가 풀린 선수는 링 위에서 선택해야 한다. 아프다고 해서 등을 돌리고 도망칠 순 없다. (그랬다간 뒤통수를 맞고 KO 된다.) 그렇다고 계속 맞으면서 “난 괜찮아”라고 우직하게 서 있는 건 더 미친 짓이다.
스탠스를 바꿔 다리를 뒤로 빼거나, 체중을 반대쪽 다리에 싣거나, 아예 상대에게 파고들어 거리를 좁혀야 한다.
열등감을 다루는 방식도 비슷하다. “아, 내가 이 부분에서 열등감을 느끼는구나”라고 인정하면, 그다음엔 전략 수정이 가능하다.
나를 끊임없이 비교의 링 위에 세우는 친구와는 거리를 둘 수 있다. (거리 조절) SNS 앱을 지우거나 사용 시간을 제한할 수도 있다. (가드 올리기) 반대로, 내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고 성장을 응원해 줄 안전한 사람 곁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코너 이동)
자기 삶의 방향키를 “나는 어차피 쟤들만큼 안 돼”라는 패배 선언이 아니라, “그래서 내 체급(상황)에서는 어떤 경기를 뛰는 게 최선일까?”라는 전략 회의 쪽으로 돌려보는 것이다.
아들러는 인간의 삶을 일, 우정, 사랑 같은 ‘삶의 과제’로 나누어 설명했다. 우리는 각 영역에서 크고 작은 열등감을 느낀다.
일에서는 능력과 성과를, 사랑에서는 매력과 친밀감을, 우정에서는 소속감과 평판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열등감은 내가 그 영역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측정기’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친구가 명품 옷을 입든 말든 아무런 열등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열등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아, 내가 이 부분을 정말로 잘해보고 싶어 하는구나.”
“내 영혼이 여기서 인정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구나.”
이 질문은 “왜 나는 이렇게 찌질할까”로 향하던 자책의 화살을, “그럼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아질까”라는 성장의 과녁으로 돌려준다.
이건 이미 카프킥을 맞고도, 절뚝거리면서나마 발을 조금씩 앞으로 옮겨보려는 용기 있는 시도다.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우리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하지만 그 모양은 바꿀 수 있다.
“나는 남보다 못났다”는 문장에 갇혀 있을 때, 열등감은 언제든 내 디딤발을 부러뜨리는 흉기가 된다. 반대로 “나는 아직 부족하지만, 나아지고 싶다”는 문장으로 바뀌면, 열등감은 나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정직한 나침반이 된다.
이 장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열등감은 좋은 거니까 즐겨라” 같은 뻔한 위로가 아니다. 다만, 카프킥이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체중을 싣고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이듯, 열등감 역시 내가 무엇을 간절히 욕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신호라는 사실이다.
그 신호를 완전히 끄고 살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정체라도 알고 맞는 편이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다음 장에서는 열등감보다 한 발 더 깊이, 더 끈적하게 들어오는 기술을 다뤄보려 한다. 겉으로 보기엔 따뜻한 포옹처럼 보인다. 서로를 꼭 껴안고 바닥에 누운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품 안에서는, 아주 조용히 팔 관절이 반대 방향으로 꺾이고 있다.
암바(Armbar). 사랑과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빠져나오기 힘든 가스라이팅(Gaslighting)의 기술과 공의존자(Codependent)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