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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관계의 5가지 파이팅 스탠스

회피형 - 경쟁형 - 수용형 - 협력형 - 타협형

by 허블

격투기를 보면 선수마다 링 위에 서 있는 자세, 즉 ‘스탠스(Stance)’가 다르다.


어떤 선수는 양손을 높이 들고 전진 압박을 하고(인파이터), 어떤 선수는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거리만 재다가 치고 빠지고(아웃복서), 어떤 선수는 케이지를 등에 지고 상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받아친다(카운터 펀처).


기술의 숙련도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잡고 있는 스탠스가 다르면 싸움 전체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대인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갈등이라는 링 위에 오를 때, 무의식적으로 ‘가장 익숙한 스탠스’를 취한다.


“더러운 꼴 보느니 피하자”며 아예 링 밖으로 나가는 사람,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끝을 보자”며 돌진하는 사람,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며 가드를 내리고 맞아주는 사람.


심리학에서 말하는 5가지 갈등 관리 유형(Thomas-Kilmann 모델)을, 이 책에서는 관계의 파이팅 스탠스로 다시 정의해 보려 한다. 내가 어떤 자세로 서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이유 없이 얻어맞는 횟수는 확실히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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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피형 (Avoiding)|“더러운 꼴 안 보고 살지 뭐” – 링 밖으로 도망가는 아웃복서


회피형의 기본 전술은 ‘노 콘택트(No Contact)’다. 갈등의 불씨가 보이면 즉시 스텝을 밟아 도망간다. 주제를 돌리거나, 침묵하거나, 자리를 피해 버린다.


직장 회의 분위기가 싸해지면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라며 급히 셔터를 내리는 상사. 연인과 싸울 것 같으면 “피곤해, 나중에 얘기해”라며 방문을 닫고 동굴로 들어가는 남자친구.


이들의 모토는 확고하다. “맞아서 피멍 드는 것보다, 기권패하고 링 밖에 있는 게 낫다.”


장점: 당장의 감정 소모를 막아준다. 겉보기엔 쿨하고 평화주의자처럼 보인다.


치명적 약점: 갈등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바닥으로 스며든다. 하고 싶었던 말, 서운함, 오해가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채 썩어간다. 결국 별거 아닌 일에 “갑자기 터지는(폭발)” 순간이 온다. 사실은 갑자기가 아니라, 그동안 도망쳤던 감정의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온 것이다.


2. 경쟁형 (Competing)|“끝장을 보자” – 닥치고 돌격하는 인파이터


경쟁형은 시작부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시선은 정면 고정, “절대 지면 안 된다”는 살기가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갈등 상황을 ‘승패(Win-Lose) 게임’으로만 인식한다.


토론할 때 상대 논리의 허점부터 찾고, 부부 싸움에서도 “네가 몇 월 며칠에 잘못했는지” 증거를 들이민다. 말싸움이 길어질수록 내용보다 ‘스코어’가 중요해진다. “방금 저 말에 내가 밀렸네? 더 센 걸로 갚아줘야지.”

장점: 추진력과 책임감이 강하다. 위기 상황에서 결단력 있게 문제를 돌파하기도 한다.


치명적 약점: 일과 사람을 분리하지 못한다. “내 의견이 틀렸다”는 것을 “내가 패배자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에 죽기 살기로 덤빈다. 그래서 논쟁에선 이겼을지 몰라도, 결국 링 위에는 자기 혼자만 남게 된다. (관계의 단절)


3. 수용형 (Accommodating)|“지는 게 이기는 거다” – 맷집으로 버티는 샌드백


겉보기에 가장 착하고 편한 사람들이다. 갈등이 생기면 일단 “그래, 내가 좀 더 참지 뭐”라고 가드를 내린다. 상대가 화를 내도 먼저 “미안해”라고 사과하고, “난 괜찮아, 너 편한 대로 해”가 입버릇이다.


장점: 관계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조직의 평화를 유지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치명적 약점: 자기 감정의 영토가 사라진다. “난 괜찮아”를 너무 오래 연기하다 보면, 나중엔 진짜로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결국 “내가 착해서 참는 게 아니라, 싸울 용기가 없어서 비굴하게 구는 건가?”라는 자괴감(Self-doubt)에 빠지기 쉽다.


4. 협력형 (Collaborating)|“같이 해결해 보자” – 최고의 스파링 파트너


협력형은 갈등 구도를 “나 vs 너”가 아니라 “우리(Team) vs 문제(Problem)”로 바꾼다. 싸움의 대상을 사람에게서 떼어내어 링 중앙에 놓고 같이 바라본다.


연인 싸움에서도 “네가 잘못했어”가 아니라, “우리가 대화할 때 자꾸 서로를 비난하는 패턴이 나오는 것 같아. 이 패턴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제안한다.


장점: 갈등을 겪을수록 신뢰가 쌓이고 관계가 단단해진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치명적 약점: 혼자서는 못 한다. 상대가 회피형이거나 경쟁형일 경우, 혼자만 진지하게 문제를 들고 서 있는 바보가 될 수 있다. “같이 풀자”고 손 내밀었는데 상대가 그 손을 때리거나 도망가면, 가장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5. 타협형 (Compromising)|“반반씩 양보하자” – 냉철한 점수 관리자


타협형은 현실 감각이 좋다. “이 싸움에서 100% 다 가질 순 없다”는 걸 알고 시작한다. 기본 전술은 ‘Give and Take’.


“이번엔 네가 원하는 거 들어줄게, 대신 다음엔 내 거 들어줘.” “서로 50:50으로 손해 보고 끝내자.”


장점: 갈등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봉합한다. 극단적인 파국을 막아준다.


치명적 약점: 애매한 불만족. 언제나 “적당히” 타협하다 보니, 둘 다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상태로 끝난다. 또한 중요한 가치관 문제에서도 “적당히” 넘어가려다 보면, 나중에 “나는 도대체 뭘 위해 사는 거지?”라는 회의감이 들 수 있다.


그럼 나는 어떤 스타일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한 가지 스탠스만 고집하지 않는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스탠스를 바꾼다.


회사 상사 앞에서는 철저한 회피형이나 수용형인데, 집에 와서 만만한 가족에게는 경쟁형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썸 탈 때는 타협형이다가, 헤어질 때는 극단적인 회피형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나는 원래 이런 놈이야”라고 단정 짓는 게 아니다.


“아, 내가 이 사람 앞에서는 자꾸 가드를 내리는구나(수용형).”

“이 주제만 나오면 내가 죽자고 달려드는구나(경쟁형).” 라고 내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걸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맨날 참기만 했는데, 이번엔 아주 작게라도 ‘싫다’고 잽을 날려볼까?” (수용형 → 경쟁형 시도) “맨날 이겨먹으려 했는데, 이번엔 그냥 져주고 관계를 지켜볼까?” (경쟁형 → 수용형 시도) “맨날 도망갔는데, 이번엔 딱 1라운드만이라도 링 위에서 버텨볼까?” (회피형 → 타협형 시도)


스탠스를 바꾼다고 상대가 갑자기 변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맨날 똑같은 패턴으로 맞다가 쓰러지는” 지겨운 재방송은 끝낼 수 있다.


이 장에서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갈등이 생겼을 때 “저 인간이 나빠”, “내가 멘탈이 약해”라고 퉁치지 말자. 대신 잠시 멈춰서 링 바닥을 보자.


“지금 내 발은 어떤 모양으로 서 있는가?”


그 발의 위치를 아주 조금만 틀어도, 날아오는 펀치의 각도가 달라진다.


다음 장에서는 관계의 스탠스를 조금 더 세밀하게 쪼개보려 한다. 지배형, 실리형, 냉담형, 고립형… 단순히 성격이 나쁜 게 아니라, 각자만의 치열한 생존 전략으로 굳어진 ‘8가지 관계 유형(키슬러 원형)’을 파이팅 스타일로 분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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