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장|방어기제 – 무의식의 가드와 카운터

by 허블

지금까지는 우리가 링 위에서 맞고 때리는 기술들(로우킥, 리버샷, 스트레이트, 카프킥, 암바)을 주로 이야기했다. 이번 장에서는 조금 다른 것을 보려 한다. 우리가 그 숱한 주먹을 맞으면서도, 링 바닥에 아주 눕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게 해 준 고마운 기술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 무의식이 자동으로 올려주는 “가드”들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방어기제는 성격이 나빠서 쓰는 것도 아니고, 멘탈 약한 사람들만 쓰는 비겁한 기술도 아니다. 그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기본 장착하고 나오는 가드 세트”에 가깝다.


강한 펀치가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것처럼, 감당하기 힘든 불안, 수치심, 공포가 다가올 때 우리 정신은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 덜 아프게” 충격을 흘려보내려 한다.

심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8가지 방어기제를, 이 책에서는 격투기의 방어 동작으로 바꿔서 불러보려 한다. 당신의 무의식은 지금 어떤 가드를 올리고 있을까?


unnamed (57).jpg


먼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방어기제는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게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훨씬 전에 미쳐버렸거나 부서졌을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학대, 감당하기엔 벅찼던 이별,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심. 그때 무의식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금 이 감정을 전부 있는 그대로 느끼면, 이 사람의 멘탈은 박살 난다. 일단 차단해.”


그래서 감정의 볼륨을 줄이거나, 방향을 틀거나, 잠깐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게 방어기제다. 다만 문제는, “잠깐 위기를 넘기려고 쓴 임시 가드”가 몇십 년 동안 기본 자세로 굳어버릴 때 생긴다.


어떤 파이터가 공이 울린 뒤에도 팔로 얼굴만 꽉 틀어막은 채 구석에 웅크리고만 있다면, 그 경기를 ‘잘 싸웠다’고 하긴 어렵다. 마음도 비슷하다. 어떤 방어기제는 분명 과거의 나를 살려줬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오히려 성장을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씩, 실전 격투기 기술에 빗대어 살펴보자.


1. 억압 (Repression) = 아예 안 맞은 척하기 (Poker Face)

도저히 감당 안 되는 기억이나 감정을 무의식의 지하실로 던져 넣고 셔터를 내려버리는 기술. “난 그런 일 겪은 적 없어”라고 뇌를 속이는 고급 스킬이다.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잘 기억이 안 나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장은 고통을 느끼지 않아 유용하지만, 지하실에 쌓인 쓰레기가 썩어서 악취(원인 모를 불안, 악몽)로 올라올 수 있다.


2. 부정 (Denial) = 노 가드 (No Guard)

피가 철철 나는데도 “나 안 다쳤어, 괜찮아”라고 우기며 가드를 내리고 서 있는 것. 명백한 위기(해고, 실연, 암 선고 등) 앞에서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라며 현실 자체를 지워버린다. 초기 충격을 완화해 주지만, 오래 쓰면 치료 시기를 놓쳐 과다출혈로 쓰러진다.


3. 투사 (Projection) = 반사 공격 (Reflection)

내 안의 더러운 감정을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기술. 내가 상대를 질투하고 있는데,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너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해? 너 나 질투하지?”라고 먼저 공격하는 패턴이다. 내 자존심은 지킬 수 있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똥물 뒤집어쓴 격”이라 관계가 파탄 난다.


4. 퇴행 (Regression) = 드러눕기 (Grounded Position)

어른이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으면, 갑자기 안전했던 어린 시절의 패턴으로 돌아가는 기술. 다 큰 어른이 혀 짧은 소리를 내거나, 밥을 안 먹겠다고 투정 부리거나, 뜬금없이 펑펑 우는 것. 격투기로 치면 불리할 때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리는 것이다. “나 때리지 마, 나 약한 애야”라는 신호를 보내 보호받으려 한다.


5. 반동형성 (Reaction Formation) = 속임수 동작 (Feint Motion)

진짜 감정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기술. 미워 죽겠는 사람에게 오히려 과하게 친절하게 대하거나, 두려워 떨면서도 “하나도 안 무서워!”라고 큰소리치는 것. 격투기에서 오른쪽으로 갈 것처럼 하면서 왼쪽으로 가는 페인트 동작과 같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해주지만, 계속 쓰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나조차 헷갈리게 된다.


6. 주지화 (Intellectualization) = 해설자 모드 (Commentary)

감정을 느끼는 대신, 차가운 논리로 분석해 버리는 기술. 링 위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갑자기 중계석으로 올라가 해설을 하는 셈이다. “지금 내 심장이 뛰는 건 아드레날린 분비 때문이고…” 하며 슬픔을 ‘이론’으로 바꿔버린다. 고통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어 유용하지만, 너무 오래 쓰면 “마음이 없는 로봇”처럼 느껴질 수 있다.


7. 합리화 (Rationalization) = 패배 인터뷰 (Post-fight Interview)

이미 벌어진 결과(상처)에 대해 그럴듯한 핑계를 대서 자존심을 지키는 기술. “어차피 저 포도는 신 포도였어”, “부상만 아니었으면 이겼어”라고 말하는 이솝 우화의 여우 심리다. 적당히 쓰면 멘탈 회복에 도움이 되지만, 과하면 “내 인생에서 배울 건 하나도 없다”는 정신 승리로 끝난다.


8. 승화 (Sublimation) = 카운터 펀치 (Counter Punch)

방어기제 중 가장 건강하고 강력한 기술. 내 안의 파괴적인 에너지(분노, 열등감, 성욕 등)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치 있는 활동(예술, 운동, 일)으로 바꿔서 터뜨리는 것. 상대의 공격 힘을 이용해 더 강하게 되돌려주는 카운터 펀치와 같다. 지금 당신이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고통을 ‘공부’하고 있는 것도, 아주 멋진 승화의 과정이다.


여기까지 8가지 기술을 훑어봤다. 이름은 낯설어도 내용은 “어? 이거 내 얘긴데?” 싶은 게 많았을 것이다.

이 장의 목적은 “방어기제 따위 쓰지 말고 맨몸으로 살아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가드 없이 링 위에 오르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메타 인지(Meta-cognition)”를 켜는 것이다. 싸우는 도중에 아주 잠깐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가드를 올리고 있지?”


화가 나는데 자꾸 웃음이 나온다면(반동형성), “아, 내가 저 사람한테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억지로 웃고 있구나.” 상대가 이유 없이 너무 미워 보인다면(투사), “혹시 내 안의 열등감을 저 사람한테서 본 건 아닐까?”


이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무의식적으로 굳어있던 팔에 힘이 빠지고, 선택권이 생긴다. “계속 가드를 올리고 있을까, 아니면 이번엔 용기 내서 잽이라도 한 번 뻗어볼까?”


가드는 필요하다. 맞으면서도 버티기 위해서. 하지만 평생 가드만 올리고 살 수는 없다. 언젠가는 가드를 살짝 내리고, 내 진짜 얼굴을 드러낸 채 세상과 주먹을 맞대봐야 한다.


그게 “도와달라”는 작은 요청일 수도 있고, “그때 진짜 아팠어”라는 고백일 수도 있다. 혹은 이 책을 잠시 덮고, 오늘 느낀 감정을 노트 한 귀퉁이에 적어보는 사소한 행동일 수도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제 ‘내 마음속 가드’에서 한 발 걸어 나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싸움’으로 시선을 옮겨보려 한다.


“더러운 꼴 안 보고 피하겠다”는 회피형(아웃복서),

“죽기 살기로 끝장을 보자”는 경쟁형(인파이터),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며 져주는 수용형(그래플러) 등.


다양한 대인관계 스타일을 파이팅 스탠스로 바꿔 보며, 우리가 어떤 자세로 관계의 링 위에 올라서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8화7장|취권 “술 때문이야”라는 비겁한 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