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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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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Sep 26. 2016

#1. 이렇게 죽는 건가 (9)

2014.10.11.~10.12. 탄자니아

 날씨는 쾌적했다. 어제는 주변이 탁 트인 길을 걸었으나 오늘은 울창한 숲 속이었다. 처음 산에 오르던 날과 비슷한 환경이었으나 이제는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닷새째 샤워도 못 하고 있었다. 고지대는 추워서 땀은 별로 안 났지만 올라가는 길에 겪었던 폭우나 진흙탕 같았던 길들이 떠올라 괜히 한 번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몸의 고달픔이 지나가니 이제야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일상에서 당연했던 일들이 당연해지지 않고, 반대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들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경험이 누적되면 다양한 자극들에 대한 역치가 높아지게 된다. 이런 소소한 것들이 쌓여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걸으며 종종 뒤를 돌아보니 킬리만자로의 하얀 봉우리가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올라가는 건 참 오래 걸렸는데 내려오는 건 한 순간이구나. 어제 아침에 저곳에 서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가끔 가만히 서서 그 풍경을 오롯이 바라보았다.


 “잠시 지나갈게요!”

 사람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산 위에서 본 모든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싣고 모시로 돌아가기 위해 모여 있는 각종 승합차와 버스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들 사이에서 겨우 줄을 찾아 서서 기다린 끝에 명부에 서명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이 5박 6일의 지긋지긋한 극기 훈련이 끝이 났다. 아니,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에는 시간적, 정신적, 육체적, 특히나 금전적으로 지불한 비용이 너무 컸으므로 취소하겠다.

 나는 지금 막 박성민의 일생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고상하고 지고지순한 뜻밖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몸 위에서 때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같지만, 뭐, 착각일 것이다. 출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반이 조금 지났을 때였는데, 마을을 향해 출발한 건 12시 다 되어서였다.


 “등산은 잘 끝났는가?”

 사무실의 아저씨는 아침에 보고 또 보는 것 같은 얼굴로 우리를 마주했다.

 “네, 잘 마치고 왔지요. 아주 훌륭한 경험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좋아, 몸은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군.”

 그는 준비되어 있던 코팅된 A4 용지 위에 서명을 하고는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킬리만자로 등반 성공 증서였다.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는 데, 마치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는 우리를 옆에 있는 식당으로 보내며 코카콜라를 한 병 씩 내주었다.

 숙소까지의 복귀는 사카 씨와 함께 했다. 그는 우리를 킬리만자로 백패커스에 데려다주고는 나에게 증서를 들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킬리 클라임버에서 이용할 모양이다. 사진을 찍고 그는 나에게 남은 용무를 처리하러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준비하고 있던 100달러 지폐 한 장을 그의 손으로 넘겼다. 그는 곧 돌아갈 것 같은 모습을 취하다가 미련이 남았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왜요?”

 “나 침낭 하나만 주면 안 될까요? 이런 곳에서 일하는 데 나는 침낭 하나 없어요.”

 나는 침낭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한국에서 무전여행할 때 쓰던 3만 원짜리 여름용 파란 침낭, 하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오기 전 호주에서 산 24만 원짜리 겨울용 침낭이었다. 등산 때에는 별도의 침낭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총 세 개의 침낭을 이용할 수 있었다. 여름용 침낭은 산에서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베개로 썼고, 겨울용 침낭은 셋째 날부터 치에미 누나한테 빌려줘서 나한테 없긴 했었지만, 어찌 되었든 다시 여행을 다니려면 둘 다 나에게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는 당연히도 파란 침낭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것들이 나에게 필요하든 아니든 나는 그에게 어떠한 것도 더 줄 생각이 없었다. 핑계가 필요했다. 그는 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잔지바르의 악몽이 떠올랐다. 여기에서 친절에는 실질적인, 다시 말하자면 금전적인 보상이 필요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일반화는 무서운 것이지만 지금 내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그 생각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줄 수 없어요. 그건 제 동생 것이거든요. 빌린 거예요.”

 열심히 대학교 신입생을 즐기고 있을 내 동생, 고맙다.

 그러자 그는 얼토당토않게도 겨울용 침낭을 눈여겨보았다.

 “그건 정말 안 돼요, 아버지가 주신 거예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한국은 이제 시원하겠네요. 이따가 전화, 아니 보이스톡 할게요.

 여기에서 그가 “헛소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입맛을 다시고는 인사도 없이 나가버렸다.

 참 후련하고 시원시원한 이별이다. 그래도 엿새간 함께 고생했는데.

 덕분에 나도 별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냈다. 빌린 옷과 장비를 반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일 다시 그곳에 방문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참, 그리고 오늘 밤과 내일 밤, 2박은 킬리 클라임버에서 제공하는 휴식이었다. 본래 계약에 들어있던 내용이었다. 등산을 마친 뒤에 킬리만자로 백패커스 1인실에서 2박. 오늘 밤은 편하게 잘 수 있겠다.


 두고 갔던 짐은 비닐봉지에 잘 보관되어 있었고 넷북 같은 기기들은 계산대에서 따로 맡아 놓고 있었다. 대강 갈아입을 옷과 급한 빨랫감을 챙겨서 2층 샤워실로 갔는데, 이런, 차가운 물이 안 나왔다. 이대로는 피부가 삶아질 것 같았으나 하는 수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주의 깊게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나오니 1층에서 씻을 줄 알았던 치에미 누나가 복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 왜 안 씻고 있어요?”

 “1층 물이 잘 안 나와.”

 “2층도 마찬가지인데요.”

 “망할.”

 나는 종종걸음으로 빨래를 널러 갔다.


 아, 이렇게 호화로운 순간이 얼마만이던가. 나는 지금 1층 휴게 장소의 벤치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충전하며 부모님, 친구들과 보이스톡을 하고 예능 방송을 보며,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여어! 잘 다녀왔는가!”

 38세 일본인 형이 입구에서 나타났다.

 “살아 돌아왔습니다. 형은 어땠어요?”

 “사파리 말이지? 일단 씻고 와서 이야기하지.”

 그렇게 치에미 누나를 포함한 우리 셋은 1층의 휴게 장소에 모여 각자 의자나 벤치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형의 말을 듣자 하니 사파리는 그다지 흥겨운 경험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형과 26살의 한국인 커플, 그리고 전에 유니온 카페에서 형을 데려간 일본인 여자까지 총 4명이 함께 한 일정이었는데 웬일인지 일본인 여자의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한 상태였다고 했다. 덕분에 여행 전체가 좀 가라앉은 느낌이었다고. 동물을 많이 보지 못한 것은 덤이었다.

 그는 우리가 정상 도달에 실패할 줄 알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치에미 누나도 거들었다.

 “나는 킬리만자로에 오르는 게 일생의 목표 중 하나여서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성민 군은 진짜 큰일이었을 거야.”

 “저는 계속 머리 아프다고 하고 짐만 됐던 걸요. 누나도 정말 대단했어요. 첫날부터 몸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정상까지 아무 불평 없이 묵묵하게 갔는걸요.”

 진심이었다. 그녀는 힘들어 보이기는 했으나 자신의 몸 상태를 먼저 내색한 적이 없었다. 반면 나는 넷째 날부터 앓는 소리를 조금 내어 내심 반성하고 있었다. 사실 전문 산악인에 대해서 지금까지 존경심을 품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깨달았다.

 그들은 대단하다.


 오랜만에 중국 음식점으로 향했다. 생선, 소고기, 닭 요리 하나씩과 밥을 시켜먹고 돌아와 밤늦게까지 떠들었다. 주제는 전보다 더 다양해지고, 정치적이어 졌다. 다소 민감한 주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걸 그룹 레이디스 코드 멤버 교통사고 사망에 대한 내용이나 일본인에게는 조금 과하게도 보인다는 한국인의 애국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각자의 소견, IMF, 중국의 성장 등의 내용 등이 그러했다. 종종 여행자에 알맞게 바오밥나무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심도 있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여행자는 외국에 있을 때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된다고 한다. 일본인인 그들은 자신들이 피부로 느끼는 사안이나 양국이 포함된 주제에 대해서 한국인인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궁금해하였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도 한국인 모두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지는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와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들어 말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의 생각에 기반을 하였기 때문에 어쩌면 편파적이거나 잘못된 내용을 전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모습과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도, 나도, 그것을 인지하기에 나의 말이 한국인 모두의 의견이며, 그들의 말이 일본인 모두의 의견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점은 오늘도 나와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 분명 값진 경험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조용한 말투로 새벽 1시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형이 잠자리에 들어간 이후, 남은 나와 치에미 누나는 각자 3시까지 휴대전화를 하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형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이어서 배웅할 겸 7시에 일어났다. 다시 1층에 셋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다가 7시 반에 숙소 앞에서 형을 보냈다. 형은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아니, 손을 이렇게 들어야지.” 하며 나를 나무랐다. 마지막까지 힘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어디선가’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나는 다시 2층의 개인 실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10시 20분에 일어나서 씻고 내려와 등산 장비를 정리하여 치에미 누나와 함께 킬리 클라임버에 들렀다. 사카 씨는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짐 확인을 하지 않았다. 배낭 안에 꾸역꾸역 들어있는 짐을 다 풀어보려면 꽤나 고달픈 작업이 될 것이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치에미 누나와 헤어져 중국 음식점으로 향했으나 일요일인 관계로 문이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의 보금자리와도 같은 유니온 카페에 들러 트로피컬 피자를 시켰는데 피자 오븐이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그러면 크림 스파게티와 바닐라 밀크셰이크 주세요.”

 나는 지금 킬리만자로 아래에 있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마을에서 휴대전화를 와이 파이에 연결한 채 스파게티와 밀크셰이크를 시켜 먹고 있다.

 아주 완벽한 휴식이다.


 “아루샤행 버스표는 어디에서 사요?”

 얼마 전 나를 이 곳 모시에 내려주었던 버스 터미널에 가서 아무 버스 기사님이나 붙잡고 물어본 질문이다. 대답은 단순했다.

 “그냥 타서 돈 내면 돼요.”

 모시에서 아루샤로 향하는 버스는 걷다가 발에 차일 만큼 많이 있었다. 내일 적당한 시간에 나오면 되겠군.

 숙소에 돌아와 예능 방송 보고, 지인들과 연락하다가 치에미 누나와 숙소 근처 인도식당에서 잔지바르 피자와 닭고기 요리를 먹은 뒤 맥주를 사 들고 왔다. 문명과 가능하면 떨어져 지내보겠다는 일말의 계획은 남아프리카에 발을 디디자마자 사라졌다.

 아무튼 참으로 훌륭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올라갈 오르막이 존재하지 않았고, 주변에는 휴대전화 무선망이 널려있었으며, 맛있는 음식들이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 내일부터 또 강행군을 해야겠지만 오늘은 이렇게 좀 먹고 놀고 쉬도록 하자.

 내일은 케냐로의 국경을 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를 도시, 아루샤로 간다. 아루샤에서는 ‘분홍 호수’라는 ‘나트론 호수’를 보고 케냐로 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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