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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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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Oct 30. 2016

#2. 뜻밖의 재회 (3)

2014.08.28.~08.29.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선뜻 방에서 김치를 꺼내와 건넸다. 라면은 그새 다 익어서 그릇에 옮겼다.

 “여긴 언제 오셨어요?”

 “어제 막 도착했어요. 오늘 나미비아 비자 신청해서 나올 때까지 며칠 머무르려고요. 형은요?”

 익은 라면을 한 입 시식했다. 그리고 한국의 치즈라면을 기대한 내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전 일주일쯤 전에 와서 그냥 쉬고 있어요.”

 “오래 계셨네요. 언제 다른 데로 가시려고요?”

 “9월 중순쯤에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사놔서 그때까지 기다리려고요.”

 “그럼 그때까지는?”

 “글쎄, 아직 뭐 할지 예정이 없네요. 혹시 테이블 마운틴 다녀오셨어요?”

 “아뇨. 내일이나 모레쯤 가볼 생각이에요.”

 “잘 됐네요. 내일 같이 가죠. 저도 아직 테이블 마운틴은 안 가봐서.”

 “좋아요. 그런데 혹시 이 주변에 맥주 파는 데는 없나요? 포도주는 많은데 맥주를 못 찾겠어요.”

 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맥주 파는데, ‘픽앤페이’ 옆에 있는 ‘픽앤페이 리큐르’에서 팔아요.”

 김치의 힘으로 라면을 겨우 다 먹고 정리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픽앤페이’라, 처음 들어보는 곳이다.

 “롱 스트리트 따라서 쭉 가다 보면 있는 KFC 아세요?”

 “거긴 본 것 같아요.”

 “그 KFC 있는 사거리에서 둘러보면 픽앤페이라는 대형 마트가 있어요. 픽앤페이 리큐어는 그 내부에는 없고 픽앤페이 밖으로 나오면 보여요. 그런데 맥주 종류는 몇 개 없더라고요.”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설거지 끝난 그릇을 눕혀놓고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나는 맥주를 구할 수 있는 정보를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맥주 종류는 정말 적었다. 알코올 사이다가 세 종류 정도 있었으나 별로 관심이 없었고, 맥주는 ‘캐슬’과 ‘빈트후크’ 둘 뿐이었다. 둘 다 9랜드, 한화로 1,000원이 안 되는 가격이어서 하나씩 챙기고, 달짝지근한 포도주가 끌려서 ‘4번가 스위트 로제’를 한 병 골랐다.

 “어니 씨, 여기 머무는 한국인 몇 번 방에 있는지 아세요?”

 “6번 방에 있어요.”

 방 문을 두드리니 형이 나왔다.

 “고마워요, 덕분에 맥주 샀어요. 그런데 내일 몇 시에 출발할지 물어보려고요.”

 그는 시계를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음, 9시에 출발하기로 할까요?”

 “그래요. 같이 술 한 잔 하실래요?”

 들고 있던 맥주 캔을 흔들여 보였다. 살짝 열려 있는 문 틈으로는 켜져 있는 노트북과 사진기, 몇 장의 종이와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들이 보였다.

 “전 오늘 유럽 여행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알겠어요. 그럼 내일 아침에 봬요.”

 “네, 그럼.”

 홀로 방에 돌아와 맥주를 열었다. 캔 따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시원하다. 캐슬이 빈트후크보다 좀 더 나았지만 아쉽게도 둘 다 그렇게 매력 있는 맥주는 아니었다. 스위트 로제 와인도 스크루 마개를 돌려 열고 병째 마시기 시작했다.

 아, 취기가 오르는구먼. 아름다운 밤일세.


 어제 저녁에 이어서 오늘 아침도 라면이었다. 어제 숍라이트에서 사 온 새우 맛 라면 두 개와 계란 두 개를 내가 준비하고 형은 덕용, 그러니까 대형 포장된 진라면 스프와 진짜진짜맵다라면, 삼립 고기만두, 김치를 가져왔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냉동식품인 고기만두는 어디서 구한 건가 싶어서 물어보니 한국 식품을 파는 가게가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호주에서 반년 동안 머물 때도 한인마트는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라면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진짜진짜맵다라면은 거의 200일 만에 처음 봤다. 어쨌든 덕분에 오랜만에 칼칼한 국물로 포식했다.


 크지는 않지만 훌륭히 도시의 중심부 역할을 맡고 있는 롱 스트리트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 북적임의 물결을 헤치고 거리를 걷다 보면 버스의 시간표가 적혀 있는 빨강, 파랑, 노랑의 알록달록한 표지와 그 옆의 사무실 하나를 볼 수 있다.

 케이프타운의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시티투어버스의 사무실이다.

 버스의 노선은 빨강, 파랑, 노랑, 보라의 네 가지로 나뉘는데 빨강 노선은 테이블 마운틴을 포함한 노선이고, 파랑 노선은 소반도투어라는 이름으로 케이프타운 외곽을 크게 돈다. 노랑 노선은 케이프타운 시내의 박물관 및 번화가 등을 돌며 빨강 노선 표 구입 시 자동으로 포함된다. 보라 노선은 케이프타운 남부에 위치한 와인 생산지를 방문할 수 있는 노선으로 파랑 노선에 포함되어 있는 컨스텐시아 정류장에서 갈아타도록 되어있다. 물론 보라 노선 역시 파랑 노선 표 구입 시 자동 포함된다. 애초에 보라 노선 출발지를 가려면 파랑 노선버스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랑 노선이 포함된 빨강 노선 1일 표와 보라 노선이 포함된 파랑 노선 1일 표는 각각 170랜드, 즉 한화로 17,000원 정도이고 그 둘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2일 표는 250랜드, 즉 한화로 25,000원 정도이다.

 각자 170랜드를 내고 빨강 노선표 두 개를 산 뒤 9시 40분 버스에 올랐다.


 “어? 비 오네요.”

 지붕이 없는 투어 버스의 2층 뒤쪽 좌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이마를 때렸다. 하지만 지붕이 있는 앞쪽 좌석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비 때문에 처음 와보는 곳의 경치 구경을 포기할 수는 없지. 문제는 테이블 마운틴이 온통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출발한 롱 스트리트 정류장은 5번 정류장이었고, 테이블 마운틴은 7번 정류장이었다. 지금 7번 정류장에 내려서 테이블 마운틴에 올라간다고 해도 보이는 것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노선 지도를 펼쳤다.

 “7번 정류장은 일단 건너뛰고 8번 정류장에 내려서 9번 정류장이나 10번 정류장까지 해안선 따라서 걸어가죠. 그리고 다시 버스 타서 부둣가에서 점심 먹고 오후에 테이블 마운틴으로 돌아오는 게 어때요?”

 “괜찮네요. 오후에는 날씨가 좀 좋아지기를 바라야겠군요.”


 8번 정류장은 ‘캠스 베이’라고 부르는 마을이었다. 케이프타운에서도 부촌에 해당하는 동네로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나 있고, 도로 안쪽에는 바닷가를 향하고 있는 여러 단독 주택들이 서 있었다. 걸어 다니면서 부동산으로 보이는 건물의 포스터들을 훑어보았는데 집값이 한화로 9억 원부터 45억 원 이상까지 상당한 가격들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칙칙한 하늘 아래의 부자동네는 생각보다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아서 9번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건 포기하고 사진이나 찍다가 다시 빨간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 정류장을 버스로 이동하여 9번 정류장에 내리니, 여전히 하늘은 우중충했으나 다행히 비는 그쳤고 걷기 좋은 길이 펼쳐져 있었다.

 “형, 형은 여행하신 곳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예요?”

 “아프리카 오기 전에 여행했던 남미요.”

 “남미요? 저 남미 진짜 가고 싶었는데. 아프리카로 안 왔으면 남미에 가려고 했었거든요. 남미 어디 다녀오셨어요?”

 “우선은요.”

 형은 볼리비아에서 했던 아마존 투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아마존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브라질이지만 볼리비아에서 아마존 투어를 하면 좀 더 저렴한 모양이었다. 투어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가 고른 투어는 10만 원에서 15만 원 수준의 가격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남미에서 스킨 스쿠버 자격증을 땄다는 것, 아르헨티나 남쪽 끝에서 빙하를 보았다는 것,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별 사진을 찍었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아타카마 사막은 천문학계에서도 유명한 곳이었다. 대기가 건조하여 전파 망원경 관측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리비아에서 데스로드 자전거 투어라는 걸 할 수 있는데 그게 장난 아니었어요.”

 “데스로드요?”

 “네, 데스로드라는 산길이 있는데 몇 시간 동안 자전거로 계속 그 내리막을 내려가는 거예요. 길도 좁은데 바로 옆이 낭떠러지여서 엄청 스릴 있죠.”

 낭떠러지 옆에서 자전거로 내리막을 내려간다고? 아무래도 스카이 다이빙이나 번지 점프랑은 좀 차원이 다른 것 같은데.

 “그거 엄청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안전 사항 지키면서 가이드랑 같이 잘 내려가면 괜찮아요. 저는 한 번 해보고 재미있어서 두 번 더 했어요. 총 세 번.”

 그는 오른손으로 셋이라는 표현을 해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앞에 달리던 사람이 갑자기 서는 바람에 피하려다가 넘어져서 팔이 다 쓸렸었죠.”

 “으으.”

 그 기분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는 곧 다른 내용으로 넘어갔다.

 “저는 되게 귀찮은 걸 싫어해서 투어나 액티비티 고를 때 그냥 마음에 들고 적당한 가격이면 별생각 없이 신청하는 편이거든요.”

 여기에서 액티비티는 번지점프나 수상스키 같은 레저 스포츠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행에서 같이 다녔던 분 중에 스킨스쿠버를 하려는데 돈을 너무 아끼려고 며칠 동안 계속 보류하면서 여기저기 투어 회사에 알아보다가 결국 마음에 드는 가격을 못 찾아서 그냥 안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있어요. 결국 그 사람이랑 같이 간 어떤 누나 분이 처음 정해놓은 회사에 만원만 깎아 달라고 한 다음에 설득해서 거기서 하게 됐죠. 사람마다 여행 방식은 다 다르겠고, 금전적인 여유가 별로 없는 배낭 여행자의 입장에선 가격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겠지만 그게 너무 지나치면 잃는 게 많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남미에서 스킨스쿠버를 하는 것은 인생에서 그다지 자주 올 수 있는 기회는 아닐 것이다. 너무 세세한 것을 고려하다가, 혹은 자신이 정해놓은 규정에 자신을 너무 옭아매어 다시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놓치는 것은 여행에서는 꽤나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앞으로 수백 일을 여행할 수도 있는 나에게는 충분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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