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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희 Dec 12. 2022

이 죽일놈의 숙취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한 지 5개월째. 


그날은 친해진 동료 네 명과 한 달 전부터 날을 잡아 낮술을 먹기로 작정한 날이었다. 긴 토론 끝에 각자의 기호를 반영하여 요즘 제철을 맞은 새우 소금구이를 먹자며 메뉴도 미리 찜해 놓았다. 토요일 오후 한 시에 퇴근을 하고 회사 근처에 횟집을 찾아갔지만 5시부터 영업 시작이라는 팻말에 좌절하지 않고 근처에 문을 연 다른 횟집을 검색해서 확인 전화까지 마친 후 우리는 십 분을 더 걸어갔다.


이른 시간에 텅 빈 가게 안에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테이블 두 개를 이어 붙여 한가운데에 다섯 명이 앉았다. 오래된 듯한 인테리어였지만 메뉴판을 쓱 둘러보니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새우 소금구이도 떡하니 쓰여 있었다. 신나는 마음에 새우 소금구이 두 개를 시키고 모둠회도 하나 주문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오늘 우리의 주종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술을 못 먹는 사람 한 명에 맥주파 한 명이 있었기에 회에는 소주지만 낮술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쏘맥으로 대동 단결했다. 우리는 사장님에게 손을 들어 소주 하나와 맥주 하나를 주문했다. 


잠시 후 냄비에 소금이 깔리고 싱싱한 새우가 담겨서 버너채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싱싱함을 과시하며 괴로운 듯 움직이는 새우를 보니 슬며시 드는 죄책감과 맛있겠다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홍빛으로 물드는 새우를 보며 우리는 쏘맥을 말기 시작했다.  


잘 익은 새우 하나를 들어 껍질을 까고 각자 하나씩 앞접시에 장전을 한 뒤 맑은 챵- 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쳐갔다. 처음은 직장 상사 험담을 시작으로 까탈스러운 다른 직원을 그리고 평소에 힘들었던 하소연을 주고받으며 빈 술병도 쌓여만 갔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봤는데 두시 삼십오분. 이렇게 시간까지 완벽할 수가 있나. 유리문 밖을 내다보니 부슬부슬 비도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본 예보에는 없었던 비라 우산을 챙겨 오지 못했다는 생각보다 하늘도 이렇게 분위기를 맞춰주나 싶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비워지는 술잔에 벌써 술기운이 오르고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오르는 흥에 하하 호호 깔깔 우리의 웃음소리는 텅 빈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새우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그동안 까먹은 새우 머리만 잘라 모아서 사장님에게 전달해드렸더니 잠시 후 새우 머리 구이라는 뻔하지만 새로운 안주가 나타났다. 거기에 모둠회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다들 뜨거운 국물이 생각난다며 매운탕도 하나 추가 주문했다. 결국 새우 머리 구이라는 안주 하나와 매운탕으로 다시 쏘맥을 말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자체적으로 2차를 가지고 보니 빈병이 7개가 보였다. 그때 다시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자리를 옮겨 진정한 3차를 가자며 누군가가 분위기를 이끌었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벌게진 얼굴을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미 술 먹는 동안 열 번도 넘게 다녀온 화장실이지만 자리를 옮기기 전 한 번만 더 다녀오겠다며 너도나도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술도 비우고 주변의 새로운 술자리를 검색하며 조금씩 발걸음을 떼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한낮이라 문을 연 술집보다는 안 연 술집이 더 많아 보였다. 거기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해서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오래된 '투다리'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투다리 가자. 투다리!"



우리 무리 중에 누군가가 한 블록 앞에 보이는 투다리를 가리키며 선동했고 누구 하나 싫다는 말도 없이 그곳으로 직진했다. 투다리 특유의 좁은 복도 양옆에 테이블과 노란빛이 도는 조명에 복도를 따라 끝에 위치한 넓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는 안주를 고르고 다시 맥주와 소주를 주문했다. 그렇게 얼마나 먹었을까. 나는 했던 말을 또 반복하는 고장 난 라디오가 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엎드려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의 기억 속에는 없는 장면이지만 그렇게 그곳에서 3시간을 더 웃으며 이야기했고 스트레스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 이만큼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사람을 동시에 네 명이나 얻은 것에 감사하며 그들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안부를 걱정했지만 사실 내가 제일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속사포처럼 지나가는 시간에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린 건 새벽 1시였다. 간밤에 지난 기억을 더듬어보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강렬한 유쾌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정신 차리라며 따라온 숙취. 


어색했던 혹은 친한 사람들과 사이가 더 돈독해지고 평소에 예민하게 굴던 부분들도 사그라들게 만드는 이 매력 때문에 죽일놈의 숙취가 또 따라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항상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마셔서 혹은 좋아하는 사람과 마셔서 더 좋은 이 술이란 것을 정말 오래오래 마시고 싶다. 그래서 운동을 하고 또 영양제를 챙겨 먹고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하며 또 좋다고 술을 퍼붓는다. 이렇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이 또 있을까. 


이 죽일놈의 숙취로 인해 지금 당장은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잘라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어제 있던 일을 다시 회상하면 빙그르 웃음이 돈다. 이럴 땐 차라리 술을 한잔도 못 마시는 사람을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하지만 역시 그랬으면 이런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찔하다. 물론 술을 즐기고 숙취는 안 따라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순 없으니 정말 삶은 공평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도 이 죽일놈의 숙취야. 벌써 오후 세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이제는 그만 가주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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