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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희 Feb 06. 2023

나는 다람쥐띠입니다.

멍 때리는 나만의 루틴

밤, 잣, 호두, 새우, 꽃게, 굴


이것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힌트를 조금 드리자면 일단 이것들은 언제든 누가 내밀어도 제가 좋아하는 최애 음식들입니다. 이 음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을 들이고 수고로움을 들여서 껍질을 까먹어야 한다는 것. 제가 이 음식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맛과 식감, 향기보다는 바로 앞서 말했던 수고로움입니다. 단단하고 귀찮은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먹어야 한다는 것. 귀찮지 않냐고요? 저는 이것들이 하나도 귀찮지 않습니다. 오히려 팔을 걷어붙이고 장갑을 끼고 장비를 챙겨서 하나씩 껍질을 까고 분리해서 맛있는 알맹이를 입안에 넣었을 때 그 쾌감을 정말 좋아합니다.      


조금 변태 같나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저 지금 상당히 진지하거든요. 



어느 날 문득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음식들을 좋아하는 것일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내린 저의 결론은 그런 수고로움을 할 때만큼은 완벽히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손으로 열심히 껍질을 까네는 그 찰나 동안은 내가 아무 고민과 생각이 없어요. 무념무상으로 그것을 상처 없이 꺼내겠다는 저의 의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죠. 사실 저는 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런 단순노동을 하는 순간을 참 좋아해요. 예전에는 아무 생각을 안 하면 바보가 되는 느낌이라 싫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꽉 차버린 머릿속을 비우기가 어려워졌고 억지로라도 비워내기 위해 단순노동이라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억지로라도 머릿속을 비우지 않으면 너무 시끄러워서 하루종일 머리가 무겁거든요. 


예전에 ’ 멍 때리기 대회‘라는 독특한 대회를 본 적이 있어요. 저는 그 대회에 나가면 아마 그 누구보다 빨리 떨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무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얼마나 정신이 건강한 일인지 몰라요.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저처럼 생각이 많아 고민인 타입인가요? 아니면 멍 때리기를 누구보다 잘하는 타입인가요? 전자라면 무슨 마음인지 알아서 안쓰럽고 후자라면 참 부럽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머릿속이 시끄러운 사람이 되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아요. 다만 머릿속이 조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냥 혹시 십이간지 띠 중에 다람쥐띠가 있다면 틀림없이 나는 다람쥐띠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단단하고 불편한 껍질을 힘들게 까서 알맹이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 혹시 저처럼 다람쥐띠가 있으신가요? 공감해 주면 좋겠지만 아무도 공감 못한다면 조금 서글플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고민과 걱정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조금은 내려놓고 살아가고 싶어요. 저의 동반자는 저에게 늘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맞아요. 인정합니다. 그래서 매일 하루에 한 번씩 껍질을 까야하는 음식을 먹어야 할까 봐요. 그러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지금 자연스럽게 최애음식을 매일 먹을 거라고 선전포고 했다고 오해하실 수 있는데 정신건강을 위한 일이니 모른 척 눈감아 주시죠.      


이제 겨울의 끝에 도달하고 있네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대부분 겨울에 나오는 것들이라 실컷 누리고 봄을 맞이하고 싶어요. 음식을 이런 조건으로 좋아한다는 게 조금 부끄럽지만 도대체 부정할 수가 없네요. 여러분은 오늘 하루에 몇 번 멍 때리셨나요? 



정신건강을 위해 억지로라도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멍 때려봐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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