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남편의 미국 장기출장이 갑자기 결정됐다. 마침 내가 일을 쉬고 있을 때였고 백신 접종도 딱 끝냈을 시점이라 큰 무리 없이 우리는 미국으로 향했다.
평소 영어라고는 헬로우 정도만 할 줄 아는 문외한이라 걱정을 했지만 코로나로 해외를 못 가본 지 오래라 무작정 남편을 따라나섰다. 처음에는 남편이 일하러 가면 나 혼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지만, 막상 가보니 걱정이 무색했다.
평소에 내가 사람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산책이나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 떨어지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터치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미국에서의 나의 하루 일과는 일단 아침에 일어나 남편과 조깅을 하고 남편이 씻는 동안 간단하게 아침 준비를 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남편이 출근을 하고 그리고 이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밤새 갇혀 있던 집안 공기를 환기시키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 바구니가 가득하면 빨래도 돌리고 욕조 청소를 하고 식세기를 돌린다. 그러면 시간은 오전 10시를 넘어간다.
이제부터 최소한의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므로 진정한 나의 시간이 시작된다. 블로그에 글을 몇 개 올리고 브런치에 들어가 좋은 글을 읽고 라이킷을 한 뒤 저장해 두었던 글을 퇴고하고 쓰기 시작한다. 이때 나만의 기준이 통과되면 브런치에 글이 올라간다. 그러고 나면 벌써 점심시간이 된다. 간단히 점심을 챙겨 먹고 매일 점심을 싸가는 남편을 위해 베이글, 식빵, 시오빵, 소시지빵 등을 냉동실에서 떨어지게 무섭게 만들어야 하므로 빵을 반죽하고 발효를 하고 굽는다. 빵을 만들면 적어도 3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그러면 이제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매트를 챙겨 아파트 내에 있는 체육관으로 향한다. 낮에도 사람이 종종 있기 때문에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매트를 깔고 이어폰을 끼고 요가를 시작한다. 한 시간 정도 스트레칭과 힘든 동작을 하고 30분 정도 실내 자전거를 탄다. 그러면 땀이 쭉 나는 게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이제 그러면 네시가 넘어서 남편이 올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집에 가서 간단히 샤워 후 저녁 먹을거리를 준비하면 퇴근한 남편과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을 챙겨 먹는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면 두 번째 내 시간이 생긴다. 낮에 바빠서 못 봤던 드라마나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전자책으로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하루에 말하는 사람은 고작 남편뿐이고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없지만 미국에서 생활이 이리 평온할 거라는 건 짐작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미국 체질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아무도 없어지니 깨달았다. 내가 평소 겪던 스트레스 중에 사람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다는 걸 말이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걸 먹으며 스트레스가 풀릴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스트레스를 풀리게 하는 관계는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관계가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만들고 있다.
이럴 때는 그런 생각을 한다. 입에 지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을 때 잠깐 닫았다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지퍼를 열어서 대화하고 말이다. 지퍼를 닫았다는 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에 지퍼의 개폐 여부를 보고 대화를 건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렸을 때는 핵인싸처럼 친구도 많고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이 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몇 년 뒤면 앞자리가 4가 되는 나이가 된 지금 이제 그만 피곤해지고 싶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와 교류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성장하는 것도 많지만 넓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 좁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평가할 순 없으므로 각자의 행복한 기준에 맞는 인간관계를 갖고 간섭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몇 개월 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복닥거리며 살겠지만 자동입지퍼가 달린 고요한 미국 생활이 너무 맘에 든다.